[칼럼/정재후] 대중 문화 이론 12 : 후기 구조주의 1 쟈끄 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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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구조주의는 사실상 자끄 데리다(Jacque Derrida)의 연구업적과 같은 말이다. -- 데리다는 한 단어를 찾으면, 한 기표 당 한 기의만 상응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기의가 있고 그 기의를 찾으면 다시 다른 기의들이 있기에, 의미는 계속 지연된다고 주장한다. “기의의 의미를 고정시키지 못하고 ---언제나 다시 지시하도록 만드는 기표에서 기표로의 끊임없는 언급”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 존 스토리, 128-129.


데리다에 의하면 그는 “그가 말하는 것을 언명(declare)하고 있었으며”, 그러나 동시에 “말하고 싶지 않은 바는 서술(describe)하고” 있다. 말/ 글, 자연/ 문명이라는 양자 대립은 이러한 모순의 해결을 통해 해체되며, 반대편에 있는 특별한 용어는 그 의미를 얻기 위해 상대편의 의미에 의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 존 스토리, 130.


기표와 기의의 대응관계가 무너진다는 것은 기호의 재현 능력에 대한 의문을 의미한다. 지금껏 기호를 통해서 자동적으로 기호 세계 바깥을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어왔다. 기표를 통해서 자동적으로 기의를 가진다는 도식 때문에 그러한 믿음이 가능했다.기표가 끊임없이 도 다른 기표를 부른다면 기의는 영원히 연기될 수 밖에 없다. 결국 기표에 의해 만들어지는 초월적인 기의는 만들어지지 않는 셈이다. 그렇다면 기의를 상정해서 설명한 구조주의적 설명, 즉 한 기표는 그에 해당하는 기의를 불러낸다는 주장은 후기구조주의에 이르러 해체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초월적 기의에 반대하듯이 절대적 진리 또한 하나의 환상이란 점을 후기구조주의는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 원용진, 254.


그(데리다)는 언어라는 것이 항상 왜곡과 다층적인 의미를 갖고 있으며 묘사하고자 하는 대상을 지칭하는 것을 넘어서 그 대상을 도리어 구성해버린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처럼 데리다는 로고스중심주의를 폐기하고 글쓰기의 역할을 중시하는 언어에 대한 이해로 나아가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그라마톨로지이다. --- 소쉬르와 달리 데리다는 기호의 의미가 랑그의 시스템에 의해서 결정적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열려 있으며, 기호의 의미는 늘 복수적이고 또한 종결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 필립 스미스,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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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JH 생각


포스트구조주의는 나중에 포스트모더니즘과 함께 공부를 더 해야 좀 이해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데리다의 원전을 읽는 것은 기호학을 전공하는 사람도 어렵다고 하니 우리가 잘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데리다는 구조주의, 그리고 모더니즘의 언어에 대한 신뢰에 의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푸꼬를 더 공부하면 더 쉬워질 것인데, 그 언어는 다름 아닌 기득권의 편견이나 의도적인 조작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양한 의미를 갖는 것이, 열린 것이 본질인 언어와 텍스트를 그런 권력으로부터, 그 권력이 만들어 놓은 담론으로부터 해체시키고 해방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서구의 이데아 철학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혁명적인 시도입니다. 본질도 없고 절대적인 진리도 없으며, 다양한 주체의 해석만 가능뿐이라는 생각입니다.


아, 어렵다고요? 당연하지요.

수천년 이어온 전통을 해체시키려는 작업인데 우리가 단번에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또 정말 그런가? 후기 구조주의의 논리가 맞다면, 정말 후기 구조주의는 누가 검증하는가? 이런 또 어려운 난제를 우리는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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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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