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9일(월) 늦은 7시, 필름포럼에서 문화선교연구원과 좋은영화관 필름포럼 주최로 영화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 시사회 및 씨네토크가 열렸습니다. 이날 게스트로는 청파교회의 김기석 목사와 이화여대의 백소영 교수가 참여했고, 문화선교연구원 책임연구원인 김지혜 목사가 진행을 맡았습니다. 다음은 씨네토크 전문입니다.
김지혜 목사: 김기석 목사님과 백소영 교수님, 영화에 대한 간단한 감상평을 말씀해 주세요. 인상 깊게 다가온 장면이 있다면 함께 말씀해 주세요.
김기석 목사: 모처럼 영화를 보니까 재미있기도 하고 의미 있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하고 다양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영화 속 숨겨진 장치가 몇 가지 있는 것 같은데요. 먼저 영화 시작 부분, 그리고 거의 끝날 부분 물속에 잠겨 들어가는 장면에 담긴 종교학적 함의가 상당히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중간에 동굴 모티브도 등장합니다. 이런 것들이 종교학에서 매우 중요한 장치인데, 영화를 만든 사람이 그런 종교학적인 스터디를 꽤 많이 하고 영화를 만들었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영화는 교회사에서 왜곡된 인물인 막달라 마리아를 복권시키는 내용입니다. 자막엔 복음서에 근거해 영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사실 복음서에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외경에 속한 ‘마리아 복음서’를 기반으로 해서 상상력을 가미해 만든 영화이죠. 영화를 본 분들이 당혹스러울 부분도 있는데 전 그 지점이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백소영 교수: 저도 간략하게 전반적 느낌만 말하겠습니다. 저도 영화 볼 수 있는 기회를 씨네토크를 통해서만 얻게 되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한 영화가 신학적 주제를 이렇게 압축적으로 담는다는 게 가능하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한 학기 내내 강의하는 것보다 영화 하나가 전하는 메시지가 강하단 생각이 듭니다. 목사님이 얘기하셨던 물속 장면도, 하나님 안에 거한단 느낌이 어떤 느낌이냐, 하나님과 함께함이란 부분에 조금 더 깊이 이야기할 수 있는 지점인 것 같습니다. 결국 씽크(sink)하는 것도 위로 솟는 것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중에 일어나는 나의 의지고 나의 선택, 나의 발견이란 부분이 강하게 작동하는 것 같아서 인상 깊게 봤습니다.
제가 최근 주로 이야기 하는 게 ‘마주봄’, ‘스며듦’이란 부분인데 그런 내용들이 많이 발견 되서 기뻤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처음 장면부터 산고로 힘들어하는 어린 임산부와 존재로서 마주보는데, 마지막에도 베드로가 “너는 우리를 나약하게 만들었고, 그분도 나약하게 만들었다”고 얘기 하는 것이 부정적으로 얘기 했지만, 서로의 번민을 함께 나눌 수 있는, 힘을 나눌 수 있는 마주봄이었다는 면에서 굉장히 신학적으로 아름답게 봤습니다. 그런 ‘마주봄’의 부분이 유난히 많이 등장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습니다.
김지혜 목사: 중간 중간에 영화가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말씀해주셨는데요. <막달라 마리아>는 감독 가스 데이비스의 두 번째 장편영화입니다. 광고를 만들다가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최근 영화계에서 비주얼리스트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도 이미지를 잘 활용하기도 하고 상징들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요, 그런 점에서 뭔가 더 이야기 해주실 것이 있을 것 같습니다.
김기석 목사: 아까 동굴 얘기를 좀 했는데, 죽은 사람을 살리는 장면이 그렇게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죽은 사람 옆에서 숨을 불어넣으신 후 동굴 속에서 깊은 번뇌에 빠지는데, 예수가 “뚜렷이 보이던 게 사라진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니 마리아가 “무엇이 사라지냐”고 묻죠. 그러니까 예수가 “생명이 사라진다”고 합니다. 그때 마리아가 격려하는 대목이 등장하는데요, 그 장치가 좀 놀랍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동굴이라고 하는 것은 죽음의 상징이기도 하며 동시에 탄생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만 보더라도 그 속에 보아야 할 것 보지 못할 것, 그림자를 실체로 알고 살던 자가 밖의 리얼한 세계를 보고 돌아오는 장면도 등장합니다만, 종교학에서 동굴이란 것은 언제나 재생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죽었던 생명이 살아나는, 즉 또 동시에 자궁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자궁은 바로 생명이 잉태되는 공간이죠. 그 속에서 예수가 내 생명이 사라지고 있다고 얘기하는데 마리아의 격려를 통해 예수가 새롭게 소생하는, 어떻게 보면 정 반대로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데, 그 대목이 흥미로웠습니다.
백교수님이 얘기한 대로 씽크(sink)의 체험, 심연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절망에 있었는데, 쭉 내려가고 있었는데 빛을 향해 올라가는 십자가를 진 것 같은 존재의 모습을 보면서 마리아뿐 아니라 모두가 떠오르는 자연이 나오는데, 그 물은 또 뭘까. 그 물은 마치 어머니의 양수에 뜬 존재처럼 느껴집니다. 죽음인줄 알았던 그 장소가 오히려 생명의 장소가 되고 있는, 생명의 역설이 앞뒤에 재미있는 장치로 있는 것 같습니다. 전 그렇게 봤습니다.
백소영 교수: 종교상징을 많이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남녀의 밀밭 씬 중 역대 인상적이었던 게 바로 이 막달라 마리아 속 밀밭 씬이 아닌가 싶습니다. 베드로도 거기서 살짝살짝 마리아를 질투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도의 자질이 많이 보이는 모습을 봤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예수님이란 인격적 리더십 하나만 보고 모든 걸 버리고 쫓은 존재였기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입성하는데 힘이 되어 줄 사람을 모으는 게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했고, 가엾게 죽어간 사람이 안타깝지만 더 큰 대의가 있다며 마리아를 재촉했습니다. 그때 마리아는 존재에 반응했다고 생각합니다. 꺼져가는 생명들에게, 그때도 ‘마주봄’이 나왔죠. 운명하는 여인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너의 삶 동안 함께하셨고, 네가 살아가면서 했던 선행 것을 기억한다”고 하며 평안하게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장면들을 베드로가 본다. 그래서 베드로가 밀밭에서 “난 한 분을 위해 많은 걸 버렸는데 오늘 본 건 자비(Mercy)였다”고 얘기하는 거에서 베드로도 마리아를 조금 더 마주봤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사실 부활 후 장면은 그냥 질투였던 거 같습니다. “왜 내가 아니고 얘를 통해서”라는 질투.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했지만 계속 남성의 권위, 수제자로서의 권위라는 부분이 마리아와 함께 마주보며 복음을 풍부하게 할 수 있는 통로를 차단한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 조금 안타까운 생각이 들면서도 마리아가 가진 온유하면서 겸손한 사도의 리더십, 사도의 부분이 잘 드러나서 밀밭 씬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김지혜 목사: 두 분이 하신 말씀들이 복음적이면서도 기존 교회나 설교에서 듣기 쉽지 않은 이야기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막달라 마리아>라는 영화가 우리에게 낯설고 생경한 부분이 있다는 건데요. 그에 대해 말씀해주시고, 설명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김기석 목사: 막달라 마리아는 행실 좋지 않은 여인으로 이미지화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그렇게 등장하기도 하죠. 일곱 귀신들렸다 나간 여인이라 얘기하고요. 또 다른 복음서에서는 “한 여자가”라고 말하는데 그 사람을 막달라 마리아라고 보기도 하고요. 영화 마지막에 “그레고리우스 교황이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라고 말해서 교회사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로 인식됐다"고 하고 “2016년 교황청에서 사도 중 사도라고 복권시켰단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복음서 속에선 예수와 함께 다닌 여제자들의 모습이 많이 등장합니다. 특별히 누가복음에 그렇습니다. 한 신학자는 예수 운동을 두 가지 특징으로 얘기했는데요. 하나는 밥상 공동체, 만나는 누구와도 식사를 함께한 것, 또 하나는 여성제자들 둔 사실이라고 하지요. 그것은 당시 유대교, 랍비들에겐 허용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예수가 그렇게 했고 또 실제로 보면 초대교회에서 여성들의 역할은 대단히 중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성경 중 좋아하는 대목 가운데 하나가 로마서 16장인데, 교리적 내용 실천적 내용 다 빠지고 사도바울이 이름을 일일이 부르며 사람들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여기에 바울이라고 하는 존재를 든든하게 세워주었던 아름다운 동역자들의 이름이 29명 등장합니다. 그 가운데 10명이 여성입니다. 굉장히 많이 등장합니다. 교회사는 이러한 사실이 조금 불편했던 것 같아요. 여성들이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 그래서 라틴어로 번역될 때 루디아를 루디아스라는 남자이름으로 바꾸기도 하죠. 또 원복음서에선 여성들이 중요하며 남녀차이가 없다고 얘기하는데, 제2바울서신 혹은 제3바울서신으로 가면 여성은 교회에서 말해도 안 되고 남자를 가르쳐도 안 되고 아이를 키우는 것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등 점점 여성의 위치가 줄어듭니다. 이것을 대표 하는 게 영화에서 베드로가 “왜 너한테만 이야기 하셨냐”고 한 것과 관련될 수 있겠죠.
또 1906년 터키, 에베소에서 오스트리아에 고고학자가 굉장히 중요한 그림 하나를 발견합니다. 동굴에서, 거기 보면 사도바울이 손을 ‘V’ 모양을 하고 있고 그 옆에 테클라란 여자가 똑같은 손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불교에도 수인들이 있는데, 손가락 두개인 수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셋은 삼위일체가 대표적 수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옛날 그림 문법을 보면 중요한 인물을 크게 그리고 덜 중요한 사람을 작게 그리는데, 여기선 바울과 테클라 둘의 크기가 같습니다. 근데 발굴 당시의 그림의 모습 속에 테클라의 눈이 훼손돼있어요. 두 손가락을 핀 테클라의 손도 훼손되어 있죠.
1906년 에베소에서 발굴된 500년 경에 그려진 바울과 테클라의 벽화
이것은 누가 의도적으로 훼손했다고 밖에 볼 수 없는데, 여자가 감히 남자를 가르치는 걸 허용할 수 없었던 거죠. 이게 교회사였습니다. 지속적으로 여성이 지위를 박탈당한 것, 어떻게 보면 성서에 대한 왜곡의 역사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 마리아 복음서가 외경이긴 하지만 초대교회 외경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영화적 문법을 통해 외경을 구현해낸 것이죠. 이러한 신학을 영상에 담아놓으니 남자들은 복음 전할 ‘과업’이 중요한데 그러나 여성들은 생명에 대한 공감능력, 아픔에 대한 공감능력이 크죠. 여성학자가 어떻게 얘기하는지 모르겠지만 여성의 그러한 능력은 어떤 질서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영화문법을 감독이 그런 측면에서 드러내고 있단 것에서 우리 시대에 적절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권력이 커질수록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공감능력이 떨어진다는 연구가 드러났지요. 요즘 나타나는 것이 바로 그런 일인 것 같습니다.
백소영 교수: 성경에서 보면 바로 왕의 경우 하나님의 말씀을 못 받는 이유에 마음이 강퍅해졌다고 합니다. 내 안의 답이 너무 강해서 하나님이 들어올 수 없는, 권력과 자기에 사로잡힌 자가 그런 것 같습니다. 영화 안에서는 유다가 자기 답에 사로잡혀서 본인이 생각한 하나님 나라가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옳다고 생각하며 죽음까지 이루어진 모습을 보았습니다. 오늘 여기 오기 전에 도서관에서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를 빌려왔습니다. 옛날에 여성신학 할 때 잠시 읽었던 것인데, 찬찬히 다시 읽어보기도 했습니다. 성경 66권으로 완전히 닫힌 계시이고 이 외경이 사라졌거나 정경화 작업에 들어오지 않은 건 하나님의 역사라고 하고, 이미 빗겨져 나간 것들을 다시 불러들여 오는 건 신앙적으로 옳지 못하단 입장에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가끔 저는 “근데 신기하지 않아요? 4세기쯤 땅에 내내 묻혀져 있다가 19세기말 20세기 초에 갑자기 짠하고 드러나는 것도 어쩌면 성령의 역사가 아닐까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필 그 시기가 여자들이 드디어 목소리를 내고 여자들이 주체가 된 시기, 여성의 의미가 더 이상 가부장제 안에서 n분의 1의 목소리를 못 내던 시절이 아닌 때에 마리아 복음서가 드러났단 거 어떤 면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닌지 되묻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전통을 확장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안 가졌으면 좋겠단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영화 마지막에 기능주의적 접근이었지만 베드로가 “우린 모두 교회가 될 건데 다만 하나의 메시지, 하나의 목적을 가질 것”이라 합니다. 그것이 복음 확산에는 큰 도움을 주었을 테지만, 기독교가 세계의 주류담론이 된 지금의 시점에서 하나의 답들이 다른 가능성들을 닫아놓고 종종 폭력적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여성의 감수성, 겸손함 등을 가지고 사역을 이해한 정황을 조금 열린 마음으로 전통의 확장이라는 차원에서 사유해도 위험하지 않단 생각이 들어요. 물론 이런 면에 영지주의를 경계했던 입장에서는 영지주의적 철학, 신학 베이스가 있단 면에 주의를 기울이기도 합니다만, 사실은 결국 복음서라는 건 인간이 하나님으로 와 계신 인간이라고 고백하는 예수님을 만나서 그분의 삶과 인격 속에서 깨달았던 것을 적은 것이잖아요. 이걸 하나로 절대화할 필요가 없이 다양한 시선을 모아 하나님 얘기를 확장할 수 있단 생각이 듭니다.
김지혜 목사: 두 분 다 영화를 좋게 보셨는데, 그래도 혹시 이 영화에서 이 점은 동의하지 못하겠다거나 아쉽다는 지점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백소영 교수: 사실 영화보고서 김지혜 목사님과 살짝 이야기 나눈 지점인데, 영화에 여성들을 위한 리더십을 마리아에게 위임하며, 여자들만 있는 우물가에서 설교한 장면이 있습니다. 거기서 이야기할 때 아주 폭력적인 윤간을 당해서 그 안에 분노가 가득 있는 여성의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공감을 잘해주시는 예수님이 중간 다 생략하고 ‘용서하라’고 하시는 부분이. 궁극적으로 거기까지 갈 수는 있겠지만 많이 불편했습니다. 하다못해 가부장적 가족 윤리 속에서 아버지나 형제가 한 것 때문에 마리아가 마음을 닫았을 때, 예수님이 마리아의 경우는 차근차근 마음을 열어주셨는데 말이죠. 윤간당하고 분노가 가득한 여성에게 분노가 있는 것이 너를 행복하게 할 수도 없고 건설할 수도 없는 분노이니 ‘너를 위해’ 용서하라 하시니 말입니다. 영성은 이해가 충분히 되는데, 제가 사회윤리학자다 보니까 “그런 불의에 용서를 하라고? 여성 운동으로 ‘미투’를 해도 시원찮을 판국에”란 생각이 들었죠.(웃음) 그런 예수께서 성전에서 기도하는 집을 장사의 소굴로 만든 상황에서는 굉장히 분노하시면서 둘러엎으시는 장면을 봤는데요, 예수님이 남성적 편견을 가지고 계셨다 생각하고 싶진 않지만 영화에서 그려질 때 왜 거기서 쉽게 용서라는 단어를 말했나, 저로선 아쉽고 다른 방식으로 그렸으면 어땠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기석 목사: 저도 철저히 공감합니다. 시편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시편 속에 인간의 적나라한 감정이 드러나기 때문이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는 아름다운 언어로만 하지 않아도 된단 걸 시편이 가르쳐줍니다. “저 자식 좀 어떻게 됐으면 좋겠다.”하는 제가 점잖게 말했지만 굉장히 격렬한 말들이 등장하거든요. 그것이 원수까지 용서하란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영 그걸 읽을 때마다 영 불편한 것이죠. 근데 우리가 살기 위해서. 미운 놈 미워할 수 있어야 그 감정을 내가 의식화하고 의식의 표면에 떠오르게 하고 하나님 앞에 노출이 됐을 때 그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에, 부정적 방식으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는 굉장히 많은 모습이 생략된 그런 모습인데, 극단적 상황 속에 용서해야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살기위해. 근데 영화는 너무 아무 설명 없이 했기에 불편한 복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로서 영화에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단 생각인데요, 예수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아름답게 전개하는 건 좋습니다. 근데 이 영화의 배경은 로마 식민지죠. 특별히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로마 식민지가 얼마나 가혹한 식민지 전쟁을 펼쳤는지 모릅니다. 병들어 있는 사람들이 병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다 뺏겨 굶주리니까 영양결핍이 되고 면역력이 줄어들고 병에 속절없이 노출되었던 것입니다. 귀신이 많이 들렸던 것은 로마의 국가 폭력 앞에 영혼이 견딜 수 없으니 분열증상, 귀신들림으로 나타난 건데 그 시대의 폭력, 그 속에 유린 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고 너무 개인화된 이야기 중심으로 이야기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영화에서 로마 군인이 등장하는 건 한번뿐이고 또 그것을 너무 상징적으로 처리해버리고 말았는데, 십자가 처형도 마찬가지고요. 그런 사회적 정황들을 너무 많이 생략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김지혜 목사: 이젠 관객 분들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관객A: 말씀하신 ‘마리아 복음서’가 매우 궁금한데요, 현직 목사님들이 '마리아 복음서' 같은 외경으로 설교 등을 할 수 있나요? 그리고 다른 예수영화와 비교하자면 어떤가요?
김기석 목사: 저는 외경 얘기를 많이 합니다. 또 지금 소위 가톨릭 성경에 아홉 권의 외경이 들어가 있는데, 거긴 지혜를 많이 언급하고 있지요. 저는 불경 얘기도 자주 하고, 심지어 사서삼경이나 노자 장자 얘기도 하고 다 합니다. 왜냐면 그런 것들이 오늘 성서텍스트를 풍요롭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냐면 성경이라고 하는 것은 주름이 많은 텍스트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60년 넘게 살았는데 5분 동안 산 얘기를 해달라고 해서 내가 5분 동안 진행했다고, 그 얘기만을 듣고 김기석 목사를 다 파악했다고 하면 안 되지 않나요? 언급된 이야기도 있지만 숨겨진 텍스트가 훨씬 많습니다. 우린 숨겨진 텍스트 속의 메시지를 찾아낼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기 위해선 굉장히 많은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성경을 상대화하잔 얘기가 아니고 그 속에 담긴 숨겨진 메시지를 찾아내기 위해선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고 때때로 마리아 복음서, 도마 복음서 이런 것이 우리에게 성서를 향해 질문을 더 많이 던져주기 때문에 인용할 수 있고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백소영 교수: 저는 목사는 아니니까 학교 강단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이고 자료들입니다. 더구나 여성신학 하는 입장에서는 엘리자베스 피오렌자가 쓴 In Memory of Her라는 책에 사복음서, 사도행전, 바울서신까지 처음 1세기에 그려진 것만 실제의 전부가 아니란 문제제기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복원할 수 있는 건 복원해 오고, 말씀하신대로 더 이상 설명 안 하는 부분을 상상하면서 넣어줄 부분이 분명히 있기에 굉장히 많이 인용하고 보는 입장 중 하나입니다. 문제는 어떤 것을 절대화 하는 게 태도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사복음서의 남성 중심적 시각은 복음을 오해한 거야, 여성주의 신학 입장으로 이걸 밀고가야 한단 입장을 똑같이 오류라고 보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영화에서도 그렇고 마리아 복음서도 가장 아름답게 느껴진 예수님이나 마리아의 부분은 '아마도(perhaps)'라는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우리가 오해한 것 같아’, ‘아마도 우리가 하나님나라를 잘못 이해한 것 같아’ 등. 말하자면 계속 진리를 찾아가는 진리추구자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크리스천은 그런 자세여야 한다는 생각인데, 복음을 흐리려는 게 아니라 우리가 가진 복음의 내용을 더 풍부하게 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자료를 곱씹는게 분명 필요할 텐데, 거기에서 삭제되고 생략된 시각을 준단 의미에서 중요한 것이지, 양자택일하는 텍스트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김지혜 목사: 기존의 예수영화와 비교해서 예수님의 이미지나 막달라 마리아의 이미지가 어떻게 다른가하는 주제로 이야기해주실 부분이 있으신지요?
김기석 목사: 그림 속에서 서양미술사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그렸던 그림들은 다 전제가 창녀이죠. 마리아의 모습은 언제나 그런 모습으로 형상화 됐습니다. 이것이 어거스틴이 원죄 교리를 만들면서 여성을 마치 악의 시작인 것처럼 위험한 인물로 만드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죠. 여성은 유혹에 약하고 유혹에 넘어가기 쉽고 그래서 이단에 빠질 가능성도 많고 인간의 원죄란 것이 성적 교섭을 통해 전달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성은 언제나 죄를 전달하는 주체로 여겨지고, 막달라 마리아는 그런 교리적 측면에서 보면 다루기 매우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오히려 한 명의 사도로서 묘사되는 모습이 참 다르죠.
백소영 교수: 예수의 이미지를 다 분석할 만큼의 영화를 보진 못했습니다만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미국에 있을 때 하도 홍보를 많이 해서 봤어요. 그 영화에서 하도 피를 철철 흘리는 장면이라 제 피가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아서 일어날 수 없었던 장면이 있었습니다. 구속의 보혈을 굉장히 강조하면서 리얼하게 그렸는데 그 부분만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그 영화에 비한다면 이 영화는 예수의 인성부분에 있어서, 잘못 생각하면 신경쇠약증이 아닐까라고 생각될 만큼 영적으로 예민한 예수님의 모습으로 묘사된 것 같아요. 제가 ‘존재의 기공성’이라는 것으로 신학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 안에 자기의 존재를 겸손하게 연 사람은 영화의 바닷속에 빠진 사람처럼 영혼의 숨구멍을 통해 하나님을 들이마시고 내쉴 수 있단 신학적 입장입니다. 요즘 ‘존재의 가공성’을 묵상하며 글도 쓰고 있는데, 이런 점에서 이 영화의 예수님은 그 부분을 잘 표현했던 예수님인 것 같습니다.
영화에서 예수님이 자꾸 중요한 순간마다 쓰러지고 계속 실신하시는데, 그 부분을 전혀 이해를 못하고 볼 수도 있지만, 저는 존재의 흐름을 잘 받아들이는 영혼의 민감성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쓰러진 순간들을 놓고 보면 막달레나에서도 공격을 하며 들어온 사람의 엄청난 살기, 성전에서도 가로막혀있는 사람들의 죽음의 기둥들을 느끼시며 힘들어하셨던 것 같고, 유다가 가진 엄청난 닫혀있는 기대를 마주하면서도 고통스러워하시죠. 스승으로서 “너는 잘못 알았어. F야” 이렇게 하지 않고 고통 받는 느낌으로 묘사된 예수, 이런 모습은 저도 인상적이었어요.
그랬기에 막달라 마리아도 한 사람의 일반적 스승인 예수님을 만났다기보다 예수님이 만난 하나님을 만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막달라 마리아가 귀신들렸단 표현도 그녀 안에 있는 내면의 빛, 내면의 목소리를 담겨 있습니다. 여성에 대한 이해가 닫혀있는 사람이 볼 때는 목소리에 따라 움직이는 삶이 정신 나간 여자처럼 보일 수 있는데, 그 부분을 불러주고 터치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마리아 안에도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님 안에도 하나님이 계신데 그런 부분들이 만날 지점을 그린 게 아닌가 싶어요. 마리아가 힘들 때 예수님 안의 하나님이 불러일으켜주고, 예수님이 힘들 때 마리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어떤 힘으로 도와주고, 사실 보면서 창세기의 에제르 케네그도(ezer kenegdo, 돕는 배필)했다는 마주봄 같은 도움, 파트너십 부분을 많이 보게 된 것 같습니다.
김기석 목사: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셨던 것처럼)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도 닦아주죠.
관객B: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마리아가 전하지만 성경에서 부활의 소식을 듣고 달려나간 베드로가 영화에선 도저히 저 방 밖으로 나갈 것 같지 않습니다. 원하는 주제를 위해서 영화가 남녀를 대척시킨 게 아닌가요?
백소영 교수: 대립 구도가 있는 게 맞는 부분입니다. 우린 베드로가 정말 뛰어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 모든 자료가 충돌할 때 팩트 체크를 할 수 있는 부분은 저희에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누가 봤느냐는 권위, 사도의 권위 때문에 중요한 부분인데, 이 경우는 솔직히 역사적 근거가 있는 게 아니라 남녀싸움이 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주의적 사고방식이 여자가 부활의 증인이란 부분을 삭제하지 않은 것은 적어도 초기 공동체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신앙고백, 증인들의 삶에서 중요한 전통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거란 이성적 추측이 가능합니다. 베드로가 뛰어간 것이 뒤에 썼든 어쨌든 남녀택일하거나 폄하될 부분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관객C: 부제가 부활의 증인인데, 이 영화는 내면의 평화, 내면에서 이루는 하나님나라를 강조하다 보니 그 하고자 하는 얘기를 위해서 굳이 부활과 십자가 장면이 없어도 될 정도입니다. 이 영화를 통해서 나타나는 부활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백소영 교수: 그것이 마리아 복음서가 외경이 되는 배경에 가장 큰 요소로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마리아 복음서에 보면 부활한 예수님과의 대화에 “환상 중에 주님을 뵈옵니다.”라고 얘기합니다. 영화에서도 베드로가 “너 꿈에서 봤냐?”하고 묻는 것처럼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한 상황에 영화의 대사를 말씀하시죠. 예수님께서 ‘이런 순간에 너는 놀라지 않는구나.’라고 말하는 그 부분이 있는데 신학자들의 이야기를 여기서 다 얘기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게 얘기합니다. 적어도 전 조직신학자는 아니지만, 마리아가 생각한 부활이라고 한 것이 영지주의적 차원일 수 있는데, 육신의 부활이라는 부분이 크게 방점이 찍힌 게 아닌 것 같습니다. 부정했단 뜻이 아니라 '죽음조차도 그분을 가둘 수 없었어요.'라는 마리아의 신앙고백처럼 그 안의 하나님과 바다에서 살아가듯 계속 함께하는 임마누엘의 삶 속에서는 어떤 것도 다 극복이 가능하다는 깨달음을 십자가와 부활이란 과정을 통해서 경험했다고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부분이 없었어도 되는 문제는 아닐 수 있습니다. 그 전에는 '아마도'라는 단어를 쓰고 답을 찾는 눈빛이었는데, 부활 이후 예수를 만난 후에는 나긋나긋하면서도 확신에 차서 얘기합니다. 자기를 배제하려는 사람을 향하여 분노하지 않고 ‘그러나 나는 들려질 것이다.’라는 확신에 찬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복음을 살아가는 거죠.
김기석 목사: 죽은 자가 정말 살아났느냐 안 살아났냐 하는 신학적 논쟁에는 답도 없습니다. 우린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도 있지만 세상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이 벌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왜 죽어야 했는지, 돌아가셔야 했는지, 근데 예수님이 성전 정화사건 이후에 마리아의 눈을 발 닦았던 그 물로 닦는데, 이게 눈뜸이거든요. 일종의 부활이죠. 새로운 세계죠. 내가 보고 있던 게 절대의 세계로 보였는데 그것이 상대화 되면서 새로운 세계가 보이고 나니까 사람을 대하는 내 마음이 달라지기 시작하고, 이것도 어떤 의미에서 부활이라고 볼 수 있죠. 그렇게 마리아가 든든히 서자 마치 여성들이 하나 둘 앞으로 나와서 참여하는, 부활의 몸들이 되고 있는, 영화 속에 그런 장치들이 숨겨져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관객D: 저는 이 영화를 너무 소개하고 싶은데 목사님 두 분처럼 멋지게 잘 이야기할 자신이 없고,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는 시켜주고 싶은데 절 이단으로 볼까봐 두렵기도 해요. 하지만 이 영화가 정말 중요한 영화라는 것은 알겠는데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요?
백소영 교수: 마음을 여는 게 한마디로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고 봐요. 제 남편은 저와 신학적인 입장이 다른데 아무리 해도 마음을 열지 않아요. 그래도 결국 존재와 존재가 만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고, 그것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하나님과 인간도 어려운데, 하물며 인간과 인간이 서로 마주봄 가운데 한마디로 들어가게 하는 방법은 없다는 생각이 들고요. 그러나 우리의 소중한 마음이 쌓여서 내공이 된다면 진실 되게 전달될 거라 생각해요.
김기석 목사: 우리가 하는 이야기가 수용이 될 때나 수용이 되지 않을 때의 문제는 신뢰의 관계, 사랑의 관계일 때는 어떤 말을 해도 이야기 해보려고 하지만 그러나 그러한 관계가 형성이 되지 않았을 때는 이성적인 말로 누군가의 입장을 바꾸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정말 어려운 문제죠. 그렇기 때문에 비언어적 언어가 중요한 것이죠. 존중하는지, 사랑하면서 이야기하는지 이런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죠. 내가 말로 누군가를 설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경험론적으로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생각인 것이죠. 내 속에 있는 절박함이 하나. 하나 모여서 전달하게 된다면 실제로 그것이 누군가의 행동으로 이어지든 말든 진솔한 말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김지혜 목사: 저는 평일에는 이렇게 문화선교연구원에서 사역을 하고, 주말에는 사역을 하는데, 부서 선생님들께 이 영화 예고편을 보내드렸더니 기존의 고정관념과 다른 마리아의 적극적인 이미지에 부담스러워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여성차별이 극심하던 시기에 여성이지만 예수그리스도를 따라서 한 사람의 제자로서 살기 원했던 막달라 마리아의 삶을 그린 영화고, 또 그런 열정을 가지고 자신을 따르는 막달라 마리아의 삶을 예수님께서 남성제자들과 동등하게 여겨주신 이야기라고 설명했습니다. 많은 한국교회 구성원들이 외경을 이단시하기 때문에 두 분처럼 외경을 적극적으로 말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이 영화가 가진 가치를 담아 전달하면 진솔한 마음이 전해질 것이라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한분의 질문에 대한 패널 분들의 답변과 씨네토크를 맺으면서 하실 마무리 말씀도 함께 해주시죠.
관객E: 마리아와 예수의 역할을 맡은 배우가 서로 연인이라고 합니다. 영화에서 그것을 의도한 건가요?
김기석 목사: 저는 두 배우가 연인인 것을 여기서 처음 알았는데요. 영화에서 그렇게 보고 싶으면 그렇게 볼 수 있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친밀함. 아까 마주봄 얘기를 했는데 그 관계를 이성의 사랑 관계로 보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보겠죠. 사람들이 그렇게 보는 걸 우리가 막을 도리는 없습니다. 그런 오해의 소지가 없었으면 좋겠지만, 또 그런 친밀함을 느끼면 안 되나? 란 생각도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 하면 창녀로 얘기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막달라라는 지역이 로마군의 주둔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기지촌인거죠. 그러니까 막달라 여인하면 기지촌 여인으로 사람들에게 이미지화된 거죠. 이것은 굉장히 가슴 아픈 이름입니다. 다른 마리아들은 자기의 고향 얘기와 더불어 나오지 않는데 오로지 막달라 마리아만 그런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지긋한 아픔이 그 속에 담겨 있는 거죠. 아까 얘기했듯 이 당시 상황이 영화 문법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마지막에 하나님 나라를 얘기할 때도 마리아가 그 나라는 우리 내면에서 시작된다고 말하는데 이것도 자칫하면 예수가 전했던 하나님 나라를 너무 내면화 시켜놓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하나님 나라 제국은 로마 제국에 마주서 있는 측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런 영화는 그런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조금 아쉬운 그 부분을 염두하고 보면 좋을 거 같습니다.
백소영 교수: 저는 두괄식으로 하자면 마리아가 마지막에 한 얘기처럼 '이건 중요한 게 아냐'가 떠오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영화적 장치에는 그런 부분들이 많이 드러났다고 봐요. 최후의 만찬 장면이 마치 혼인잔치처럼 그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리아와 예수가 둘이 들어가더니 빵 떼어 먹고요, 이런 부분들이 의도 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정통은 아니지만 어떤 스토리들의 라인은 그랬다고 흘러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도 100% 인간이었는데 인간의 모든 걸 안 하고 산다는 게 더 이상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친밀함의 감정이 무슨 색깔이었든 인간성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듭니다. 저한테 큰 문제라고 생각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예수님의 신성을 폄훼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야말로 영지주의라고 생각하는데 예수의 몸으로 산 삶을 우리가 부정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둘이 어디까지 무슨 관계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아쉬움이 있는 것은 목사님 말씀처럼 새로운 전통을 확장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넣으면서 논란이 가능한 장면을 넣어 놓는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불필요한 논쟁 여지를 줌으로써 더욱 강조하고 싶은 걸 강조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김지혜 목사: 저는 막달라 마리아를 보면서 가장 의미 있게 다가왔던 부분이 바로 마지막에 마리아가 묵상하는 ‘천국은 마치 한 여인이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라는 부분이었습니다. 여인도 겨자씨 한 알을 심을 수 있는 천국을 전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말이 저에게 깊게 다가왔습니다. 앞으로도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여성과 남성이 함께 파트너십을 이루어 귀한 사역에 힘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성과 남성이 함께 이야기할 때 복음, 하나님과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해도 더욱 풍성해지고 온전해질 수 있겠지요. 긴 시간 끝까지 씨네토크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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