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0일, 저녁 6시부터 좋은 영화관 필름포럼에서 영화 사일런스 씨네토크가 있었다. 금번 씨네토크는 문화선교연구원 백광훈 원장의 사회로 진행되었고, 패널로는 청파감리교회 김기석 목사, 성락 성결교회 지형은 목사, 이무영 영화감독이 참석하여 진행되었다.
영화 사일런스는 엔도 슈샤쿠의 소설 침묵을 원작으로 거장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연출한 작품이다. 이번 씨네토크에서는 영화 속에 담겨 있는 순교와 배교 문제, 고난 속에 침묵하시는 하나님의 부재에 대한 질문, 그리고 엔도 슈사쿠의 문학과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가 이야기하는 침묵의 관점 등 영화 감상의 깊이를 더욱 풍성하게 해준 시간이었다.
백광훈 문화선교연구원장(이하 백)
침묵은 영화를 보고 침묵이 흐르는 경우가 많다. 영화 제목에 어울리게 무거운 마음으로 영화를 보고 나온 공통적인 표정을 봤던 것 같다. 영화를 본 소감은?
김기석 목사 (이하 김): 마음이 무겁다.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는 신앙적 신학적 도전이 크고, 오늘의 한국교회 현실 속에서 이 영화가 던져주는 도전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이런 영화는 자기의 신앙이 바른 것인지, 허위 의식을 신앙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을 품어봐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무겁다.
지형은 목사 (이하 지): 제가 처음 얘기 안하게 돼서 다행이다. (관중 웃음) 신앙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의심이 포함된다는 견해가 있고, 신앙하면 의심이 없는 것이 신앙이라는 견해도 있다. 저는 질문, 의심, 번민이 공존하는게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그쪽이 더 맞다고 생각한다. 이 침묵이란 영화가 그쪽에 방점을 두고 기독교신앙에 대해서 고민하게 하는 영화다.
이무영 감독 (이하 이): 단순하게 제가 가졌는 느낌은, 저 신부들의 신었던 신발을 내가 신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것이다. (웃음) 이정도 수준의 신앙으로도 믿음이 있는 것처럼 신앙생활 할 수 있는 평탄한 세대를 살 수 있어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도 신앙의 번민이 많이 남아있는 것 같다. 의심가운데 믿고 있는 마음.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이라는 영화 속에도 그 분이 그 나이에 느꼈을 번민을 많이 느꼈다. 이제는 좀 더 차분한 느낌으로, 주님께 확실하게 의지하려는 믿음이 느껴졌다.
백: 스콜세지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스콜세지 영화와 관련된 질문을 드리자면, 사실 침묵도 영화를 준비하는데 28년이 걸렸다는 이야기가 언론에 보면 나온다. 그 외에 스콜세지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 의식이 있을텐데. 스콜세지 감독 영화의 철학은 어떤 것인가?
이: 스콜세지는 독실한 신자.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을 만들 즈음에 원작 소설을 본인이 읽게 되었다. 그 당시의 신앙의 수준이나 상태로는 그 원작을 이해하고 만들 수준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언젠가 만들리라 생각했다고 한다. 이제는 죽음이 다가오니까 도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돼서 만들어봤다고 인터뷰 중 이야기 했다고 한다. 영화를 만들기 위한 오랜 시간 준비라기보다는, 처음에는 이 영화를 만들 만 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백: 엔도 슈샤쿠의 소설, <침묵>이 이 영화의 원작인데, 이 책에 대한 이해도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엔도 슈샤쿠 문학 세계에 대해 문학평론가이기도 한 김기석 목사님 말씀해 주시면 좋겠다.
김: 일본의 제국주의 야욕 때 중국 다롄에서 생활한다. 그곳에서 엔도의 아버지가 가정에 충실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외도. 버림받은 가정. 엔도의 어머니는 어린 엔도를 데리고 동경으로 돌아오게 된다. 어머니는 버림받은 상처 속에 신앙으로 귀의한다. 그 속에 가톨릭 신앙이 엔도에게도 자연스럽게 전해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문제는 서양의 종교는 일본 제국주의에서 적성국가의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것이 된다. 어디에서나 주목과 따돌림의 대상이 된다. 이후 일본 패전 후 엔도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게 되고, 낯선 환경과 인종 틈에서 소외되는 경험을 하던 엔도는 버림받은 사람들을 향한 시선이 생긴다. 엔도의 시선은 사회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 넘어지고 좌절하는 사람들에게 가 있다. 영화 속 기치지로는 엔도의 모든 문학에 꼭 등장한다. 끝없이 넘어지지만 계속 돌아오는 약자들에 대한 눈길. 엔도는 슬픔의 현상학. 사건 때문에 슬퍼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조건으로 인해 슬퍼지는 슬픔의 깊이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난다.
백: 패널들께 짓궂은 질문을 드린다면. 저 당시 로드리게스 신부라면 어떤 선택을 하셨을지?
김: 저는 밟았을 것 같다. 능력 있는 예수가 아니다. 그분이 가진 능력은 함께 슬퍼하는 능력. 우는 사람과 함께 울고 열병을 가진 사람과 함께 손을 잡아주는 것. 영화에 등장하는 예수 초상화는 승리자 예수다. 영화에 등장하는 예수의 초상화는 엘 그레코의 승리자 예수가 등장한다. 이것이 로드리게스 신 로드리게스는 처음에 승리자 예수로 출발하지만, 속절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의 아픔이 내면에 내재되기 시작한다. 변해가는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승리자 그리스도에서 세상에 화육하는 그리스도로 일체화 되어가는 모습이 되어 간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얼굴이 변해가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침묵하는 것 같았지만 나의 존재 자체로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셨다. 아주 강렬한 메시지다.
물에비친 로드리게스 신부의 얼굴이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하고 있다
엘 그레코 作 "성의를 들고 있는 성베로니카" 中
백: 이미지와 관련된 해석이 신선했다. 영화를 이번을 포함에 세번째 보았지만 엘 그레코의 성화가 그런 의미로 읽힐 수 있다는 것은 의미 있는 통찰인 것 같다. 이무영 감독님이 보는 감독으로서의 영화를 보는 관점은 어떤가.
이: 페레이라 신부의 실패가 당연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가르쳤던 것을 그들이 그대로 바로 알고 죽은 것이 아니다’. 라는 대사에서 서양 사람들이 동양을 보는 논리와 이성으로 본인 신앙의 우월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동양에 대한 존중을 가지고 전해지는 복음이 중요하다. 페레이라 신부가 이런 서구의 시선을 대변하지 않았나 본다.
나는 오히려 더 명확해 졌다. 침묵하고 계시지만 침묵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는 확신. 하루가 똑같고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 같은 침묵이지만, 침묵 속에 다가오는 작지만 어마어마하게 큰 위로가 있을 거라는 믿음이 더욱 확고해졌다.
백: 교회에는 승리한 자의 이야기는 많지만, 배교한 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전무하다는 것에 대해 이해시키고 싶었다는 것이 엔도의 말인데, 한강 블루스를 만든 이감독님 함께 슬퍼하는 자들에 대한 연민이나 느낌에 공감되는 부분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이: 교만함이 아닌 겸손한 자세로 세상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대한민국교회는 작은자들, 없는 자들, 슬픈 자들에 대해 만족스럽지 못하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질문과 마음을 가지고 소박하고 겸손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생각한다.
백: 결국은 아파하는 자들과 함께함에 대한 느낌을 공감하고 있는 것 같다. 한국 교회의 탈종교 또한 제도교회가 거기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종교인이 늘어난다는 이야기를 함께 나눴다. 이 영화가 한국교회에 던지는 메시지, 목회자로서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에 대해 한 말씀 부탁한다.
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반대로 풀면 사랑은 하나님이다. 개신교 신앙으로 보면 개신교는 전도가 최우선이다. 하나님의 절대명령은 두 가지인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리는 것 한 가지이고, 또 한 가지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다. 어려운 사람에 대한 공감능력이 없는 것은 신앙의 타락이다. 죽어가는 것에 대한 공감능력이 있어야 한다. 영광의 신학이 기독교 타락의 원인이 되었다. 승리의 그리스도, 김목사님 말씀하신 영광의 그리스도를 말할 때가 타락의 시기이다. 우리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말해야 한다.
김: 텍스트나 영화를 볼 때 ‘이것은 이런 것이다’라고 규정하는 것은 좋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신 것. 삶에 견딜 수 없는 모순이 있고, 정답이 없는데 몸부림친다. 이것이 삶이고, 그렇다보니 정답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단함이 있는 것이다. 윤동주의 팔복에서 슬픔은 복이라고 한다. 슬픔이 어떻게 복일 수 있나. 그렇지만 윤동주에게 이 세상에 속절없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슬퍼할 수 있는 것이 복이라고 하는 것이다. 결국 이 작품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침묵 속에 하나님이 어디 있었느냐가 중요하지 않고, 침묵 속에 당신은 어느 편에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이 중요하다고 본다.
한국의 개신교회가 질타의 대상이 된 것은 결국 권력의 맛을 본 것이다. 돈은 줄지 알지만 낮은 곳으로 가진 못한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다.
백: 분위기를 바꿔서 관객에게 질문해 보겠다. 영화 속에서 나누고 싶은 것이 있다면 나누어 달라.
박가영: 김기석 목사님께 질문이 있다. 목사님께서 예전에 비가 세차게 올 때 약자들과 같이 있을 때 우산을 씌워주는 것 보다 같이 맞아주는 것이라는 목사님 말씀에 감동을 받은 적이 있는데, 로드리게스의 배교는 자기 합리화는 아닐까.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김: 나의 가장 소중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누군가의 희생되는 것을 나몰라라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이 작품은 말하고 있다. 우리 신앙의 길은 늘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너 그것은 합리화 아냐? 라고 말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고심하고 가고 있는 사람들의 입장을 우리가 귀기울여야 한다.
지: 나는 개인적으로 로드리게스 신부가 배교한 것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저는 이 배교에 대한 결론이 영화에는 없다고 본다. 배교 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거냐 저거냐 단순화가 아니라 이것인지 저것인지 고민해 볼 수 있는 관점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신앙은 진리에 관한 문제이므로 내가 딱 생각한 것을 맞다고 고수하는 것이 신앙에서 위험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모든 주제는 열려있지 않나 생각한다. 우리를 당황스럽고 고민스럽게 하는 것은 감독이 충분히 목적을 달성하지 않았나 싶다. (웃음)
박상희: 침묵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감 없음 이라고 다가 왔다. 신부들이 하나님과의 교감을 아주 간헐적으로 짧은 순간을 가지고 평생을 살았다고 본다. 신앙의 의미가 고통받는자들과 함께 있는 것이라면 그들과 함께 울어주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예수님 대속의 의미는 무엇인가?
지: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의 문제와 연결된다. 거룩한 영, 성령이 우리의 삶가운데 함께 계신다.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것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다. 임마누엘이다.
김: 아주 중요한 질문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나라는 존재는 팔레스타인의 예수 존재만으로 볼 것인가. 그분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삶의 방식으로 봐야 할 것인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길은 걷기 위해 있는 것이다. 진리도 그렇다. 진리도 구현해 내지 않으면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항상 동사화 해야 한다. 생명도 그렇다. 생명을 낳고 풍부하게 하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고, 이것이 예수가 보여준 삶이다. 그 삶의 결과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온전함의 회복이다. 우리가 거룩해진다, 우리가 온전해 진다, 구원받는 다는 것은 상처나고 깨졌던 나의 존재가 타자를 향해 열리고 하나님의 마음아픔을 향해 열려서 그 마음과 일치를 이루었을때를 구원받은 상태라고 본다면, 영화 속에 고통받는 삶과 함께 울면서 거룩한 얼굴에 발을 얹는 행위에 은총이 없다고 볼 수 있는가. 그렇게 생각한다.
백: 오랜시간 시네토크를 했고, 몇 편의 설교를 들은 느낌이다. 각자의 감상을 더욱 풍성하게 하고 더 깊은 사유로 이끌어 준 씨네토크라고 생각한다. 사일런스가 우리 신앙의 모습들, 신앙과 삶의 결들을 어떻게 만들어 갈까 고민하게 하고, 타자를 끌어안고 삶의 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우리에게 중요한 물음을 던져주는 영화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긴 시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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