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재밌다!” 영화를 보고 길을 나서는데 경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필자와 같은 관에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을 보고 나온 20대 청년들로 보였다. 흥미로웠다. 왜 90년대생들은 9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을 볼까?
몇 년 전부터 계속되는 복고 열풍은 경제 불황 속 팍팍하고 고단한 현실에 대한 불만족이 야기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시절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행복했던 과거의 그리움을 충족시키고, 경험하지 못했던 젊은 세대에게는 신선함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90년대 중반은 7% 대의 경제성장률,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달성하면서 호황을 누리던 시절이었다. 펜티엄 컴퓨터가 히트상품이 되고 플립형 휴대폰이 출시되는 등 정보화, 전산화가 막 이루어지던 참이었다. 문민정부가 세계화 원년을 제창하면서 OECD 가입을 추진했고, 영어 붐이 일었다.
하지만 과거의 낭만 이면에 잊힌 것들이 있다. 1991년 낙동강에 페놀이 유출되면서 많은 시민들의 생명이 위협받고, 자본시장의 개방이 외국 자본의 막대한 유출입을 낳으면서 결국 IMF로 이어지게 된 것처럼 말이다. 이전까지 가난하지만 똑똑한 수재들이 입학했던 상고 대신 대학 진학률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사회적 차별이 발생하고, 실내 흡연이나 커피, 담배 심부름과 같은 사적 용무를 부하 직원에게 시키는 게 당연시되었다. 성희롱과 성차별, 환경오염에 대한 사회적 인식 또한 부족했을 때였다. 이러한 9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경력 8년 차, 업무 능력과 상관없이 커피를 타거나 잔심부름 신세를 면할 수 없었던 만년 말단 고졸 여사원들의 승진기이다. 또한 글로벌 경제 성장에 몰두하느라 간과하고 은폐하던 문제들을 기득권의 비리에 맞서 씩씩하고 명랑하게 해결해나가는 “작고 작은” ‘영웅’들의 성장과 연대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90년대를 지나온 이들은 영화가 끝난 뒤에 다가올 현실, 곧 영화에서 빛나는 성취를 이룬 이들이 IMF의 여파로 가장 먼저 구조조정의 대상이 될 것을 알고 있다. 현실의 문제들은 영화처럼 쉬이 끝나지 않고 조용하고도 끈질기게 취약한 사람들의 목을 조여 온다. 한국경제가 급격히 성장하던 당시 만연했던 사회적 이면들, 불합리와 불공정, 차별의 이슈들은 개인의 삶의 애환과 결코 무관하지 않으며 지금도 계속 반복되고 있다. 일례로 코로나19는 고용 문제, 성차별과 맞물려 사회적 위치가 불안정한 젊은이들의 일상부터 위협했다. 20대 실업급여 지급이 급증하고(58.9%), 3월에만 20대 여성 12만 명이 실직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데, 1~8월 20대 여성의 자살시도(32.1%)가 전 세대 통틀어 가장 높았다. 1990년대생 20대의 자살률이, 1950년대생이 20대일 때보다 여성 7배, 남성 4배에 달하는 등 청년 자살률이 높아지고 있음에 경각심이 필요하다. 원인을 단순히 심리적인 데서만 찾아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
왜 90년대생들이 9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을 보냐고 묻는다면, 추억의 감성이나 재미 이상의 것을 말하고 싶다. 의미 있는 일보다 원하지 않는 일을 하다 소진되기 일쑤인 평범한 사람들, 세상에서 수없이 거절받고 좌절한 존재들에게 과거 비슷한 삶을 견뎌낸 선배들의 목소리로 “어제보다 오늘 더 성장”했다고, 조금씩이라도 다 함께 나아가자고 격려하기 때문이다. 거대한 장벽을 마주하며 무력감을 느끼는 청춘들에게 왜 일을 하는지,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에 대해 스스로 고민하도록 할 뿐 아니라,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며 다시금 현실을 살아갈 용기를 불어넣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심보람(박혜수)의 멘토로 등장하는 봉현철 부장(김종수)은, 사람들이 “사회는 점점 썩어가는 것 같아. 그래도 말이야. 옛날이 좋았다, 쉽게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것 아닐까. 옛날을 안 살아본 사람한테 너무 무책임한 말이잖아. 나에게 지나간 시간이 소중한 것처럼 누군가에게 좋은 시절이었으면 좋겠어.”라고 말한다. 지금 또한 누군가에게 좋은 시절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두가 함께 현재를 좋은 시절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과거 좋은 시절을 보낸 이라면 더욱 말이다.
필자는 아무리 절망적이라 해도 하나님이 희망이시며,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희망을 전해야 한다고 믿는다. 교회는 현실 도피적인 내세를 꿈꾸기보다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야 할 책임이 있다. 또래의 죽음을 목격하며 위태로운 삶을 살아가는 생명들을 향해 “같이 살아내자”는 응원과 연대의 메시지를 교회에서 듣고 싶다.
*이 글은 <한국기독공보>에 실린 글에서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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