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글은 필름포럼에서 열린 <루터> 씨네토크의 녹취록을 정리한 것입니다.
최주훈 목사입니다. 영화는 잘 보셨나요? 항상 이런 자리에 설 때 마다 루터교회 목사를 처음 보신 분 손들어 보라고 합니다. 오늘은 하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저를 잘 아는 분들도 꽤 있는 것 같아서 생략하겠습니다. 한국에 루터교회는 총49개, 전/현직 모두 합해야 목사 숫자는 총 70여명 밖에 되지 않는 교단 목사입니다. 그래서 저를 소개할 때 마다 “여러분은 지금 천연기념물 숫자보다 적은 멸종위기 동물을 보고 계십니다.”라며 강연을 시작합니다.
종교개혁일을 1517년 10월31일로 기산하기 때문에 올해가 종교개혁 5백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러다 보니 메뚜기도 한 철이라고 저 같은 멸종위기 동물이 이렇게 여러분 앞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루터가 교회 역사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영화를 통해 보셨으니 지루한 신학과 교리이야기는 좀 접어두고, 오늘 영화 이야기부터 시작해 볼까요?
오늘 영화를 어떻게 보셨습니까?
2003년 개봉된 이 영화는 한 마디로 좋은 영화입니다. 왜냐하면, 2003년도 이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저는 독일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첫날 개봉된 다음날, 제 선생님이신 한스 슈바르츠 교수님이 박사과정 수업에 들어와서 “내가 결혼하고 40년만에 처음으로 영화를 봤다”면서 자랑하신 게 생생히 기억납니다. 그 때 생각에 나는 못 봤지만 세계적인 루터학자가 결혼 후 처음 볼 정도라면 그건 두 말할 나위없이 좋은 영화겠구나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선 처음 제가 이 영화를 보게 된 건, 2006년 여름인데, 학위를 끝내고 한국에 돌아오기 직전에 없는 돈을 다 털어서 유일하게 소장품으로 구입한 DVD를 통해서 입니다.
전 이 영화를 보고 남다른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 전공이 루터신학인데, 처음 느낀 건, 이건 단순한 영화가 아니라는 걸 알아챘습니다. 이 영화의 대사는 루터의 어록을 뼈대로 구성되었고, 줄거리는 역사 고증이 썩 잘 되어 있습니다. 물론 여기엔 역사적 사실과 다른 영화적인 요소도 꽤 섞여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영화는 1505년 7월 5일 슈토테른하임의 번개 사건부터 시작해서 곧바로 1507년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의 수도사 신분에서 사제 서품을 받는 것으로 빠르게 전개가 되고, 수도사 생활, 1510년 로마여행, 그후 기존교회에 대한 실망, 비텐베르크에서 교수생활, 1517년 면죄부에 반대하는 95개조 반박문, 그리고 급진적 개혁의 실패, 1525년 농민전쟁, 결혼 사건으로 전개됩니다. 그리고 영화의 끝은 1530년 6월 25일 아욱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 루터파 신앙이 받아들여지는 것까지 이어집니다.
물론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줄거리 전개 한 가운데 역사적 팩트와 영화적 요소가 섞여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리를 저는 아이 그레테와 젊은 엄마 한나 이야기, 비텐베르크 선제후인 현자 프리드리히를 만나 독일어 성경을 증정하는 사건 같은 것은 허구입니다. 단순한 영화적 요소입니다. 하지만 이걸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루터의 종교개혁은 단순히 책상에서 일어난 학자들의 개혁이 아니라 목회적 차원이 강하다는 것을 이런 영화적 장치를 통해 잘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영화적 요소가 기가 막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통 루터의 종교개혁을 너무 딱딱하게 교리적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식으로 풀지 않고 눈높이를 대중들의 이해 수준에 낮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루터가 1483년 11월 10일 태어나서 1546년 2월 18일까지 살았으니, 이 영화는 루터 생애의 일부만 다루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지만 루터의 종교개혁 진행과정과 아픔이 가장 극심했던 시기를 잘 선택한 것 같습니다.
종교개혁의 의미
루터의 종교개혁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권위에 대한 믿음을, 믿음에 대한 권위로 대체한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권위란 교황의 교권과 성직자들의 교권을 뜻하는데, 면죄(벌)부가 그 정점에 서 있습니다. 이런 인간의 권위를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되돌려 놓은 사건이 바로 종교개혁 정신의 핵심입니다.
물론 말은 쉽지만 현실적으론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누군가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것은 자기 터전과 목을 걸어야만 감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일을 감행했고, 그런 도전이 우리의 교회 역사 안에 새겨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종교개혁’, 또는 ‘프로테스탄트 정신’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런 정신을 네 가지 혹은 다섯 가지 ‘오직’의 원리로 설명합니다. ‘오직 말씀만으로, 오직 은총만으로, 오직 믿음만으로,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라는 원리가 그것입니다. 다들 들어 보셨을 겁니다.
일반적으로 종교개혁 정신을 이와 같은 솔라(Sola) 정신으로 소개하지만, 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곤 합니다. 전세계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을 저처럼 말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저는 제 방식을 ‘개똥 신학’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네 가지 핵심어입니다. ‘질문, 저항, 소통, 새로운 공동체’. 이 이야기는 영화 이야기와 함께 잠시 후에 개략적으로 보충 설명하도록 하고 영화의 시작 부분으로 한 번 돌아가보도록 하지요.
첫 장면은 루터가 에르푸르트 대학에 입학해서 본과인 법학부에 입학한 지 채 몇 달 되지 않은 1505년 7월부터 시작합니다. 많은 분들이 첫 장면을 보고 오해할 만한 여지가 충분합니다. 왜냐하면 루터가 앞날이 창창한 법관의 미래를 포기하고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원한 것은 위대한 결단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설명되어야 하는 것은 루터의 서원은 당시 시대상으로 보았을 때 그리 유별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종교에 귀의하는 사람들을 만나보면 모두 루터처럼 인생의 특별한 이야깃거리를 하나씩 가지고 있지요. 예를 들어 잘 나가던 직장을 하루 아침에 그만두고 신학교에 들어가서 목사가 되겠다고 하는 것도 루터의 수도사 서원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이런 간증거리는 있고, 아마 목사나 스님이 된 사람들 대부분은 이런 이야깃거리를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겁니다.
게다가 영화 대사에서 살짝 언급하고 지나가서 눈치채셨을지 모르겠지만, 루터가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원한 대상은 예수나 하나님이 아니라 ‘성 안나’입니다. 영화 대사에서는 이 부분을 교묘하게 넘겼는데, 원문은 “성 안나여 내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입니다. 여기서 안나는 루터의 고향이던 만스펠트 지역에서 광부들을 지켜주던 지역 수호성인입니다. 우리 말로 하자면, 산신 할매에게 서원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일종의 미신적 서원입니다. 당시 이런 서원은 여러 곳에서 성행했기 때문에 루터의 수도사 서원은 그리 특별하지도, 훌륭한 신앙적 결단도 아닙니다. 그냥 후대에 우리가 드라마틱하게 극화시킨 것뿐입니다.
루터 당시로 돌아가보면 이런 일은 아주 비일비재했는데,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사회적 요인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제가 종교개혁사를 언급하면서 항상 언급하는 것은 흑사병입니다. 14세기 중반부터 16세기 중반까지 전 유럽을 휩쓸었고, 사료에 의하면 1347년부터 약 3년간 불어 닥친 첫번째 페스트로 인해 유럽의 전체 인구 중 3분의 1이 죽음에 내몰렸다고 합니다. 그 후로도 10여차례에 걸쳐 유럽을 강타합니다.
흑사병이 몰고온 중세 사회상은 죽음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공포 그 자체였지요. 그 외에도 의료 수준이 지금 같지 않았기에 아침에 벌레 물렸다가 저녁 때 고열로 죽은 일, 아이 낳다가 죽은 일, 흑사병으로 마을 전체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일들이 다반사였습니다. 죽음이 일상 한 가운데 가까이 있다는 것은 곧 자기 인생을 진지하게 대하는 사람들에게 죽은 다음 생애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게 만드는 결정적 요인이기도 했습니다.
엄친아였던 루터 역시 아버지의 뜻대로 법관이 되는 길을 잘 걷다가 갑자기 수도사가 된 것도 이런 이유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슈토테른하임의 번개사건이 있기 바로 2년전에 이미 루터는 허벅지에 칼이 찔러 동맥 손상을 입게 되는데 그 때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됩니다. 그리고 번개 사건이 있던 그해 초, 자기 학교 법학 교수 3명이 흑사병으로 죽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 때 임종 직전에 있던 교수의 말이 루터에겐 일종의 트라우마로 자리 잡게 됩니다. 임종 시 교수가 했던 말이 이렇습니다. “내가 차라리 법학교수가 아니라 수도사가 되었다면 차라리 좋았을 것을…”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축적되어 번개사건은 자기 인생을 돌이킬 사건이 됩니다.
그 외에도 흑사병이 종교개혁의 방아쇠 역할을 하면서 신학적으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이유도 있습니다. 죽으면 ‘천국 아니면 지옥’이라는 이중도식 한 가운데 ‘연옥’이란 개념이 들어선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사후 세계의 결정을 조정할 수 있다는 교회의 가르침은 매우 매혹적인 것이었고, 그것을 이용해 당시 교회는 성물숭배라든지 면죄(벌)부 같은 것들을 만들어 팔기 시작합니다.
그 결정체가 루터를 파문했던 레오 10세의 성 베드로 성당 건축입니다. 루터의 95개조 논제는 바로 이것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교황이라 할지라도 사후세계를 결정할 수 없고 오직 최후의 심판주로 오실 그리스도의 권한이라는 것입니다.
흑사병은 하나님의 저주로 알려졌고 전염병이었기 때문에 시신을 수습하는 것은 언제나 사제들의 몫이었죠. 그 때문에 당시 직업군 가운데 사망률이 가장 높았던 직업은 묘하게도 가장 거룩한 직업이라고 여겨졌던 교회의 사제그룹이었습니다.
13세기, 스콜라 시대만까지만 해도 성직자가 되기 위해선 귀족가문에서 오랫동안 교육받아야만 성직자가 될 수 있었지만 이런 상황은 14세기 흑사병 이래로 돌변하게 됩니다. 흑사병으로 죽어 나간 사제들의 자리를 메꾸기 위해 교육 받지 못한 사제들이 대거 교회 안으로 유입됩니다. 지금이야 목사나 신부가 되려면 거의 7-10년 교육을 받아야 하지만, 14세기 말부터는 일단 안수 받고 그 이후에 사제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루터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그러다보니 교육 받지 못한 사제들로 인해 교회는 급속도로 수준이 떨어지고, 일반신자들의 불만은 커져갑니다. 게다가 교육 받지 못한 사제 그룹들이 대거 교회로 유입되면서 돈이면 사제도 되고 주교도 되고 교황도 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됩니다. 그러니 교회가 부패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요.
교회 역사로 보면, 1440-1520년까지를 소위 ‘르네상스 교황기’라고 부르는데, 한 두명의 교황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부정부패, 성직매매, 교회 토지 사유화, 사제들과 교황의 축첩 같은 행위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습니다. 이런 중세말 교회의 부패는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앞서 언급한 흑사병의 철퇴가 큰 몫을 하고 있습니다.
르네상스 교황기의 부패가 얼마나 심각했었는지 그 상징 하나가 영화에서 잠깐 나옵니다. 1510년 루터가 수도원 문제로 수도원 대표로 로마에 가게 됩니다. 원래 에르푸르트에 11월에 출발해서 알프스를 넘어 거의 3개월 이상을 걸어서 가는데, 영화에선 화창한 날에 로마에 입성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은 겨울입니다. 어찌되었건 사료를 보면 루터가 그곳에 가면서 충격을 받은 것은 그가 유숙했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의 식탁이 로마에 가까워질수록 기름지고 화려하게 변했다는 점입니다. 수도회 가운데서도 루터가 몸담고 있던 수도회는 검박한 삶과 금욕을 강조하는 곳인데 이상하게 로마에 가까워질수록 금욕과는 전혀 다른 식탁이었다고 루터는 회고합니다.
그 외에도 로마라는 도시가 교황이 있는 하나님의 도성으로 순진하게 생각했던 루터가 로마에 당도했을 때 교황청 부근에서 만난 사제들을 위한 공창지역을 보고는 큰 충격에 빠지게 됩니다. 이 사건은 당시 교회의 부패상을 말하는 단면일 뿐입니다.
자기가 머리 속으로 상상하고 꿈꾸던 기독교와 현실이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선 루터는 그 후로 기독교에 대한 강한 회의감을 갖게 됩니다. 오늘로 말하자면 일종의 ‘가나안 성도’가 된 것이죠.
실망하고 고뇌하는 루터에게 기회가 찾아옵니다. 수도원 원장 요한 슈타우피츠는 루터를 비텐베르크로 보내서 거기서 성서학을 공부하게 만드는데, 루터는 거기서 1512년 학위를 받고, 성서를 공부하면서 성서의 말씀과 교회현실이 얼마나 다른 지 더욱 확실하게 직시하게 됩니다.
여기서 유념할 것은 루터가 단순히 대학에만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시민 전체가 2천 명이 조금 넘는 소도시 비텐베르크의 시교회의 설교자로 일하면서 목회자로서 그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교육받지 못한 일반인과 사제들이 성서에 대해 너무 무지하고 구습에 사로잡힌 것을 보게 되었고, 이런 현실에 목회자로서 그리고 신학자로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1517년 10월 31일 <면죄부에 관한 95개조 논제>입니다. 그 첫번째 조항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의 주요 선생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회개하라 명하셨을 때 그 회개는 신자의 전 삶이 돌아서는 것이다.” 마4:17에 나오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말씀을 풀어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첫째 조항이 강력한 파워를 가진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교회에선 제롬의 라틴어 성경만이 유일한 경전이고, 이 라틴어 성경에 의심을 가져서도 안되고, 해석해서도 안 되는 것으로 가르쳤습니다. 오직 읽고 해석할 수 있는 권리는 사제에게만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사제가 아닌 사람이 해석하거나 가르치면 그것은 신성모독이 된다는 이유였습니다.
루터가 95개조 논제를 게시하던 1517년 잉글랜드에서 있었던 사건입니다. 아이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기 위해서 아버지가 영어로 번역했다가 교회 당국에 발각되어서 그 가족 일곱 명이 모두 화형 당한 사건이 있습니다. 이처럼 중세 사회는 라틴어 성경으로 모든 언로를 통제하고 권력구조를 이어 가게 됩니다. 그렇게 1,100년 동안 라틴어는 유럽사회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언로를 통제하면서 종교 기득권자들은 권력을 유지했습니다.
이런 폐쇄적 상황이 14세기 말부터 조금씩 균열이 생기게 됩니다. 인문주의자들의 발흥을 통해 ‘원천으로 돌아가자’(ad fontes)는 운동들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핵심은 다른 게 아니라 라틴어가 아니라 성서의 원문인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알아야 된다는 운동입니다. 그래서 나오게 된 것이 바로 1516년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성경입니다. 그리고 이 성경은 곧장 루터가 95개조 논제 제 1항을 쓰게 된 배경이 됩니다.
이제껏 사람들은 마4:17을 라틴어 성경에 쓰여진 대로 ‘죄 값을 치러라, 천국이 가까웠다’라고 읽어 왔고, 교회 당국은 천국 가기 위해 죄값을 치르는 ‘보속’이란 개념을 만들어 고해성사 시스템을 만들어 교회 권력을 유지해 왔는데, 헬라어 성경은 그게 아니라 ‘회개’ 즉 ‘메타노이아’가 원문이라는 것을 폭로한 것이죠. 메타노이아란 죄값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가던 길을 돌리는 것’, 즉 ‘전 삶을 돌이키는 것’이란 사실을 루터가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루터는 1,100년 동안 속아왔던 것을 95개조 논제 제 1조를 통해 고발하고 개혁의 불을 당기게 됩니다.
물론 학자들과 지식인 그룹에서도 당시 교회의 부패와 무지한 상황을 비판했습니다. 에라스무스가 대표적인 케이스입니다. 그러나 학자들의 교회 비판은 한계가 있었는데, 바로 라틴어를 사용할 줄 아는 지식인 그룹에서만 이런 비판이 가능했다는 점입니다. 교회 당국 역시 이런 학자들의 비판은 어느 정도 통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루터의 특별함은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루터는 지식인 그룹에겐 라틴어와 철학으로 대항하고, 그 내용을 민중에겐 그대로 독일어로 풀어 설명했다는 점이 아주 특별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당시로서는 통념의 파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루터가 즐겨 사용하던 말이 하나 있습니다. “나는 신학박사이지만 독일어를 사용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 말을 비틀어 보면 신학박사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저급한 평민들이나 사용하는 속어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통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당시 라틴어 문맹률이 대도시(뉘른베르크)의 경우 95%에 달했다는 것은 당시 사회 안에서 라틴어가 어떤 방식으로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는지 이해 할 수 있는 중요한 맥락입니다.
라틴어와 독일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면 지식인과 비지식인을 아우르면 소통할 수 있었던 점은 종교개혁의 가장 큰 무기가 됩니다. 야마모토 요시타카라는 일본의 문화 사학자는 15-16세기를 ‘문화혁명’의 시기라고 명명하는데, 거기서 핵심은 커뮤니케이션의 혁명이라고 밝힙니다. 그러면서 라틴어 사회가 속어화 되어가는 과정이 바로 문화혁명의 핵심이고, 그 대표적인 인물로 루터를 꼽습니다.
이렇듯 루터는 위 아래를 아우르는 인물이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신대륙의 발견이라든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문화 예술에 대한 루터의 입장 같은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합니다. 이런 내용들은 여러분들이 일반 역사를 통해서도 충분히 찾아보실 수 있기에 생략하겠습니다.
라틴어가 아니라 독일어라는 속어가 종교개혁의 힘이 되었다는 것은 여러 곳에서 감지됩니다.
다시 95개조 논제로 돌아가봅시다. 우리가 종교개혁일로 알고 있는 1517.10.30은 루터가 95개조 논제를 게시한 날인데,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당시 파급효과는 거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루터는 그 글을 라틴어로 썼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 이듬해 독일어로 이 내용을 요약하여 설교하고, 출판하고 급기야 ‘95개조 논제 해설’이란 것을 출판했을 때야 비로소 종교개혁의 불길이 일기 시작합니다.
그 외에도 오늘 영화에서 보았듯이, 루터는 1521. 4.16일 보름스 제국의회에 들어가서 18일 최종변론하게 되는데 거기서 유명한 말을 하게 됩니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 잡혔습니다. 양심을 거스르는 것은 불안하고 안전하지도 않습니다. 그 때문에 나는 나의 글과 주장을 철회하거나 거스를 수 없습니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
그런데 이 말을 할 때 루터는 처음엔 라틴어, 그리고 곧바로 독일어로 선언합니다. 영화에서는 이런 것을 보여주지 않습니다만, 이런 일련의 과정은 루터가 가진 소통의 힘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성서의 말씀을 통해 스스로 읽고 배운 것들을 통해 현실을 직시하고 질문하고, 그 다음 저항하고, 그리고 혼자서 개기는 것이 아니라 소통을 통해 설득하며 함께 손을 맞잡고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루터의 종교개혁이 우리에게 전하는 프로테스탄트 정신입니다.
보름스 제국 의회 직후 루터는 아이제나흐의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납치 또는 피신하게 됩니다. 거기서 루터가 단 11주 만에 신약성서를 번역하게 되고 그 이듬해 9월에 출판됩니다. 이걸 소위 ‘9월 성경’이라고 부릅니다. 루터가 성서를 번역하면서 꿈을 꾸었던 것은 출판을 통해 돈을 벌려고 했던 게 아닙니다. 실제로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돈을 번다는 것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졌기에 인쇄업자들로부터 인세를 한 푼도 받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가 성서번역을 통해 꿈꾸었던 것은 신자 스스로 성경을 읽고, 스스로 질문하고, 실천하게 만드는 것을 꿈을 꾼 것이죠.
왜냐하면 자신이 성서의 말씀을 통해 깨달은 것이 1,100년 동안 속았던 역사를 뒤 엎어 버리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의 힘이 곧 저항의 힘이 되었고, 이런 저항과 소통의 결과물들이 교회 현장에서 제도화 되면서 개신교의 역사가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보통 말하는 Sola scriptura 정신입니다.
신학적으로 보자면, 루터의 이런 성서 번역은 신자 개인을 하나님 앞에 세우고, 사람 위에 사람 없다고 하는 평등가치를 주장하는 ‘모든 신자의 만인사제직’으로 확장됩니다. 그리고 만인사제직은 모든 세속직업의 직업소명론, 교회의 직제, 성례전 신학, 보편교육의 시작, 교회에 의한 사회복지 시스템(디아코니아) 같은 다양한 각도로 발전됩니다.
물론 루터를 너무 이상적인 인물로 추앙하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화에선 농민전쟁을 너무 루터 입장에서만 그렸기 때문에 아주 낭만적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실상은 루터의 한계 역시 뚜렷합니다. 저는 이런 루터의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시대의 아들’로서 한 개인의 한계가 잘 드러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헤르만 셀더하위스라는 세계 칼빈 학회 회장이 최근에 루터에 대한 글을 썼는데 ‘유령의 숲에서 하나님을 추구한 사람’이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그 표현이 참 기막힌 묘사입니다. 가끔 루터를 영웅이나 신비한 사람으로 추앙하는 이들도 만나지만 제가 볼 때 루터는 철저히 ‘시대의 아들’입니다. 중세라고 하는 미신적 세계 안에 살았고, 거기서 고뇌하던 인물입니다. 예를 들어 루터의 글에서 마귀라는 단어가 빈번하게 튀어나오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어떤 때는 투사 같은 모습, 또 어떤 때는 아내인 카타리나 폰 보라에게 바가지 긁히고 쩔쩔매다가 제자들에게 아내 뒷담화하는 그런 헐렁한 사람이기도 했다가, 교회에서는 열정적으로 설교하다가 교인들이 자기 설교를 잘 듣지 않는다고 삐쳐서 저런 인간들 앞에선 다신 설교 안하겠다며 두어 달 설교단에 오르지 않는 그런 인물이 루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위대한 종교개혁가라고 부르는 것은 복음에 철저히 사로잡힌 사람, 그리고 자신이 복음 안에서 깨달은 기쁨과 자유를 다른 사람도 누려야 한다면서 성서를 번역하고 당시 교황권에 도전한 사람, 누구나 스스로 읽고, 스스로 고민하고 스스로 행동할 줄 알아야 한다며 아이들과 부녀자들을 위한 보편교육을 시작한 사람, 다방면에서 그가 남긴 업적은 유령의 세계 숲에서 서서히 나와 근세로 나아갔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루터의 종교개혁에서 배워야 할 점은 질문하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헤겔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근대란 끝까지 질문하는 정신이다.’ 루터에게 꼭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아무도 질문하지 않던 세계를 향해 질문하고 저항하고 소통하며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낸 인물이 바로 루터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따져보면, 21세기라고 하더라도 질문하는 힘이 현대교회 안에 없거나 이 질문을 원천봉쇄하고 있다면 우린 중세말 교회를 살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교회라면 개혁이 필요하겠지요. 한 개인의 개혁 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 그리고 사회 전체의 개혁 말입니다. 질문하는 힘에서 새로운 공동체는 탄생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종교개혁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메시지입니다.
간단히 줄이겠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이 시대 우리에게 주는 정신은 분명합니다. 스스로 성서를 읽고 현실에 대해 질문하고, 그리고 저항하고, 소통하며 새로운 공동체를 이 땅에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권위에 대한 믿음을, 믿음에 대한 권위”로 바꾸어 나가는 작업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우린 모두 죄인이지만 그리스도를 통해 모두 의롭다고 인정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린 모두 가치 있는 인간으로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섬겨야 합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습니다. 이것은 개혁자가 발견한 복음의 자유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복음의 자유를 위해 우리의 현실에 질문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루터가 남긴 개혁의 유산입니다.
2017.6.22. 필름포럼에서
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주일 예배안 참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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