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영화가 말해주는 ‘현재가 갖는 의미’
우리가 현재 머물고 있는 3차원의 세계를 벗어나지 않는 한, 시간은 인간의 선천적인 조건으로서 죽을 때까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한계이다. 변화를 거역할 수 있는 인간은 어디에도 없다. 원하든지 혹은 원치 않든지 인간은 시간에 따라 변하게 되어 있다. 인간 자신만이 아니라 인간이 맺고 있는 모든 관계 역시 변한다.
게다가 시간은 불가역적이라서 오직 한 방향으로만 진행된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변하는 것은 누구나 겪는 일이나, 어른에서 아이로 변하는 일은 적어도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을 불가역적이라 한다. 이런 한계 때문에 시간을 소재로 다루는 판타지들은 언제나 그 한계를 벗어나려고 했다. 그래서 그럴까 독일 신학자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의 시간은 미래로부터 온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물론 그 주장은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현실이 하나님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다.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가는 내용을 담은 대표적인 작품은 스콧 피츠제럴드의 단편 소설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데이빗 핀처, 2008)이다. 이 영화는 아이가 장성하여 노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80대의 노인으로 태어나 점점 젊어지다가 나중에는 아이로 변한다는 내용이다. 시간 경험과 관련해서 매우 독특한 상상력을 발휘해 인생의 의미를 색다르게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나나츠키 타카후미의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해서 만든 <나는 내일, 어제의 너를 만난다>(이하 <나는 내일>로 약함) 역시 구조적으로 보면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와 같다. 시간이 거꾸로 가는 세계에서 온 여자 에미(고마츠 나나)가 등장한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다르다. 우선 <나는 내일>은 서로 반대되는 시간의 흐름을 가진 20대 두 남녀가 만나 연애하는 30일간에 집중한다. 특히 이 기간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통해 영화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 경험에서 인간에게 현재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성찰한다. 불교적인 세계관이 짙게 배여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내일, 어제의 너를 만난다>의 줄거리 (스포일러 있음)
타카토시(후쿠시 소우타)는 전철 안에서 우연히 에미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더는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타카토시는 에미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거절당할 줄로만 알았던 타카토시는 뜻밖에 에미의 승낙을 받고 기뻐한다. 마치 서로가 오래 전부터 알고지낸 것처럼 그 후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둘의 만남으로 행복해하던 타카토시는 어느 날 30일간의 일정이 담긴 에미의 메모장을 보고 놀란다. 왜냐하면 그 내용은 타카토시의 시점에서 30일 후부터 시작하여 에미와 처음 만난 날까지 일어난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타카토시의 30일간의 미래를 기록해 놓은 것 같긴 하나 도대체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타카토시는 깨닫지 못한 채 의아해 할 뿐이다. 그러는 중에 에미에게서 메모장에 얽인 숨겨진 사실을 듣고 충격을 받는다.
에미가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이렇다. 지금 타카토시가 살고 있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있는데 에미는 그 세계에서 왔다. 무엇보다 그녀의 세계에서는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 그러니까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가는 세계가 아니라 미래에서 현재를 거쳐 과거로 가는 세계다. 두 세계가 서로 겹치는 주기는 5년이며, 그것도 단 30일간만 지속한다. 그들은 이전에도 몇 차례 서로 만났는데, 5살 때 타카토시가 물에 빠졌을 때 35세였던 에미가 구해주었고, 그 후 타카토시가 15살이었을 때 나타난 에미는 25세의 나이로 그에게 5년간 잘 간직하라면서 작은 상자를 건네주었다. 그 안에는 아직 타카토시가 경험하지 못한 미래를 담은 기록들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서로 20세가 되던 때에 다시 만난 것이다. 아니 에미가 의도적으로 20세의 타카토시를 만나기 위해 접근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만나 20대의 열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기간은 오직 30일 뿐이다. 30일간의 일정은 바로 이 기간을 의미한다.
영화 이야기는 타카토시의 시간 경험으로 전개된다. 타카토시나 에미나 그들은 단지 현재를 살아갈 뿐이나 서로에 대해서는 과거와 미래를 살아간다. 타카토시의 미래가 에미에게는 언제나 과거다. 둘이 기억을 공유하는 건 오직 현재뿐이다. 타카토시의 시점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그들의 하루하루는 오직 타카토시만 기억할 수 있다. 하루가 지나면 타카토시에게는 내일이어서 어제의 일을 기억할 수 있으나, 에미는 이미 그 이전의 과거로 돌아갔기 때문에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날마다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그들이 서로를 알아보는 건 현재의 만남에서 타카토시의 기억을 공유할 때뿐이다. 에미는 매 순간을 잊어버리게 되니 보기에 따라서는 이전 일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는 알츠하이머 증세와 다르지 않다. 30일간의 정해진 일정을 모두 마친 후 그들은 각자 서로의 세계로 돌아간다. 에미는 모든 것을 잊을 수밖에 없으나, 타카토시는 그녀와 함께 보낸 30일의 추억을 결코 잊지 못한다. 타카토시가 30세가 되는 때에 에미는 10살 소녀이고, 타카토시가 35세가 되는 때에 에미는 5살 아이가 되어 모습을 드러낸다. 그녀는 그렇게 작아지며 사라질 것이고, 그는 그렇게 늙어가며 사라질 것이다. 그들의 말대로 그저 스쳐지나가는 만남이 아니라면 시간은 다시 되돌려질까?
헤어짐을 알고 시작한 만남
기발한 상상력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느끼는 바는 각자 다르겠으나, 수많은 관객들이 눈물을 훔치게 만드는 영화임에는 분명하다. 시간 경험에 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필자는 로맨스보다 시간 경험을 어떻게 표현했는지에 관해 집중하며 감상하였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이미 미래로부터 오는 시간 개념을 알고 있는 터라 관심이 증폭했고, 더불어서 최소한 작가나 감독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건지 의문이 들었다.
로맨스 장르에 비교적 충실하게 진행되는 이야기에서 두드러진 정서는 슬픔과 기쁨이다. 에미는 눈물이 많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것을 이미 알고 만나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매 순간이 마지막이다. 그리고 에미에게서 모든 사정을 알게 된 타카토시 역시 예전처럼 마냥 기뻐할 수 없는 처지다. 헤어질 것을 들어서 알 뿐만 아니라 어제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에미를 매일 만나는 일이 쉽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기억을 공유하지 못할 뿐 아니라 헤어질 것을 예상하고 만난다고 생각하니 그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다. 그러나 타카토시는 에미가 겪는 고통과 그녀의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면서 그녀와 함께 현재에 충실한 시간들을 보낼 것을 결심한다. 비록 기억을 공유할 수 없는 관계라도 매일 매일 서로를 즐거워하면서 지내기로 한 것이다. 영화가 이르는 지점은 바로 여기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감독은 인간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할 뿐 아니라 관계의 증진에 기여하는 것은 서로에게 가장 행복한 현재가 되길 최선을 다하는 일임을 강조하고 싶은 것으로 독해된다.
가장 아름다운 만남의 순간
사실 그렇다. 서로 어떤 상이한 세계관을 갖고 있든 만남의 순간은 소중하다. 불교에서는 인연이라 말하며 모든 만남에 가치를 부여한다. 그런데 지난날들을 가만히 곱씹어보면 인간의 만남을 어긋나게 만드는 주범은 과거에 얽매이는 것과 미래를 염려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살아온 방식을 고집하며 과거에 대한 집착을 표현하여 상대를 힘들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관계를 가지면서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을 염려함으로 상대를 지치게 만든 것이다. 이것이 현재를 망치게 만드는 주범임을 안다면 이제라도 현재에 대해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영화는 바로 이런 메시지를 담고 있다. 다시 말해 과거가 어떠했든지 또 미래가 어떻게 될지 상관없이 두 사람이 만나는 현재에 서로를 위해 충실한 삶을 사는 것이 서로에게 가장 최선의 길을 걷는 것은 아닐지 싶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를 즐기고 미래를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혹은 과거야 어떻든 현재에 충실하자는 의미로 말하는 건 아니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분명 오해다. 현재에 충실한 삶이란 기본적으로 과거를 스스로 정당화하고 또 미래를 스스로 구성하려고 노력하지 말라는 의미다. 다만 인간으로 할 수 있고 또 마땅히 해야 할 최선은 서로의 기쁨과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마치며
라틴어 경구인 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비록 누구에 의해서 주도되는 삶이 아니라 주체적인 삶을 살라는 의미이지만, 무엇보다 현재에 충실한 삶을 강조하는 의미에서는 비슷하게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한 다른 맥락이지만 예수님 역시 우리가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 것을 말씀하셨고, 또한 하나님의 용서를 통해 우리가 더는 과거에 매여 살지 말 것을 환기하셨다. 과거와 미래가 아니라 지금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신뢰하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우리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는 가장 좋은 길은 과거에 집착하거나 미래를 염려하지 말고 오직 현재 서로가 서로를 도우며 서로의 행복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일이 아닐까.
최성수 |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문화선교연구원의 취지 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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