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목회자가 찬양 인도자에게 바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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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에 인도자 한 명이 몇몇 예비 찬양 인도자를 위한 강연을 요청하며, “찬양 인도자에게 목사가 원하는 모든 것”을 말해 달라고 했다. 내심 길어 봤자 서너 가지겠지 생각하며 그러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건 약간 순진한 생각이었다. 글을 다 쓰고 보니 14가지나 되었다.

“목회자가 찬양 인도자에게 원하는 것”에 상응하는 항목들을 보면 좋겠지만, 일단 지금은 예비 찬양 인도자에게 할 수 있는 조언을 해 보겠다.


1. 사람들에게 예배에 반응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성도들에게 너무 차갑다고 비난하고 싶은 충동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인도자로서, 이런 잘못은 우리에게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사람들이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가장 좋은 출구 방법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이다. 인도자의 출구는 사람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방법을 묻는 것이다.

예배에 알맞게 반응하는 법은 가르쳐야 한다. 사실, 성경에서는 예배의 자세를 “명하고” 있다. 찬양 인도자로서의 임무는 찬양 인도자 주위의 사람들과 비슷하게 되는 것을 포함하여, 성경이 추천한 예배의 자세를 갖도록 하는 것이다. 시편에서 가장 빈번하게 볼 수 있는 두 가지는 손을 들거나(시편 28:2, 63:4, 88:9, 134:6, 143:6 등) 외치는 것(시편 20:5, 22:22, 35:27, 47:1, 66:1, 81:1 등)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백인이 대다수인 우리 교회에서 예배하면 바로 연상되는 이미지는 아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예배하고 있는 위대하신 주님을 생각하며 사람들에게 몸을 쓰고 목소리를 내라고 해야 한다.

실질적인 측면에서, 이미 이 임무가 떨어진 곳의 사람들을 가르치기 시작한다면 도움이 된다. 스텝과 인도자를 가르치고, 동일한 마음이 있는 곳으로 이끌어 가야 한다.


2. 자세가 마음을 이끈다.

우리는 전인격적인 존재로 만들어졌다. 지성, 감성, 신체가 모두 서로 조화를 이루며 일한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소통의 70퍼센트에서 95퍼센트는 말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말 한 마디 하지 않고도 우리의 생각과 느낌을 상당히 전한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무릎 꿇고 일어서고 노래하고 외치고 손을 들라고 명하고 있다. 성경에서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으니 기분이 내키면 하나님께 외쳐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단순히 “외쳐라”라고 한다. 우리의 마음이 종종 예배에서 우리의 자세를 이끌지만 이와 같이 자세도 우리 마음을 이끈다.

이런 말을 할 때 듣는 말은 진심도 아닌데 이런 행동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명에 다가가는 데 좋은 방법은 아니다. “마음이 간통을 원하기 때문에, 아내에게 충실한 것은 위선일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순종이란 감정에 따라 오르내려서는 안 되는 것이기에, 죄에 대한 갈망에서 벗어나 하나님에 대한 갈망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3. 사람들은 공연자를 원하는 게 아니다.

목회자가 의도적으로 대충 설교하면 안 되는 것처럼 의도적으로 노래를 대충 하라는 것이 아니다. 찬양 인도자는 사람들 앞에서 단순히 노래하라고 있는 자리도 아니다. 설교 뒤로 숨어선 안 된다. 나와서 사람들과 섞여야 한다. 마음껏 자신의 기량을 발휘해야 한다. 찬양 인도자로서 그저 같은 공간에서 찬양 인도자처럼 성도들이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할 수 있도록 성도들을 이끌어야 한다.


4. 원하는 바를 목회자와 상의해야 한다.

특정한 노래를 하고 싶거나 또는 하고 싶지 않은 이유를 목회자와 상의하면, 함께 실질적인 목표에 다다르기 쉽다. 예배는 계시와 응답의 리듬이 되어야 한다. 목회자와 뜻이 같으면, 특정한 노래와 무대를 꾸리기가 더 쉬워진다.


5. 청중의 기분을 고려한다고 해서 변칙적인 것이 아니다.

찬양 인도자는 공연자가 아니다. 이 점을 확실히 해 두고 싶다. 그렇다고 너무 “신학적”이어서 찬양인도의 예술적인 부분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음악과 노래를 다루어, 특정한 사회문화적인 요소를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것이다. 느리고 부드러운 곡을 계속해서 부르고 있는데 사람들이 자리를 뜬다고 놀랄 필요는 없다. 사람들이 신앙이 없는 게 아니다. 단지 기분에 따르는 것이다. 

예화로 설교를 시작하듯이, 예배를 시작할 때 일반적으로 묵상과 어울리고 구슬픈 곡이 아니라 빠른 곡으로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런 식만 고수해서는 안 되겠지만, 다 무시해서도 안 된다. 분위기를 만들고 예술적인 부분을 사용하여, 가지고 있는 재능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사람들을 이끌어가야 한다.


6. 사람들이 당황할 수 있는 것을 피해서 말해야 한다.

모든 찬양 인도자가 공적으로 말하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말하고 있으므로 현명해질 필요는 있다. 락음악 공연무대에서 더 어울리는 “여러분, 안 들려요.”나 “즐길 준비 되셨습니까?”와 같은 말을 한다면, 말하고 싶은 것을 정확히 쓰는 게 낫다. 무엇보다도 노래 가사가 써져 있으니까, 일정한 형식을 따르도록 가사로 이끌어 가는 것이 나쁜 생각은 아니다. 


7. 계획한 대로만 하지 말고, 분위기를 읽어야 한다.

예배 무대는 설교와 똑같다. 무대를 계획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예배를 시작했는데, 갑자기 직관적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곡이 어울리지 않네. 계획한 대로 승리에 젖은 듯 빠르게 하지 말고, 속도를 늦춰서 사람들에게 여유를 갖게 해야겠다.” 너무 이렇게만 한다면 주위 사람들을 화나게 할 수 있지만, 계획을 변경할 수 있는 융통성도 있어야 한다.

분명히 느껴지는 바를 설명할 때, 현장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당시의 상황과 깊이 교감해야 한다. 종종 찬양 인도자가 시작할 때 노래하고, 빠지고, 뒤에 한두 곡을 하며 돌아온다. 찬양 인도자가 예배 대부분에 제외되어 있을 때만큼 나쁜 것 없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끝부분에 말하고 노래하는 것이 앞부분과 잘 이어져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찬양 인도자가 필요한 것이다.


8. 설교를 다시 할 필요는 없다.

찬양 인도자에게 일반적으로 드는 유혹은 설교를 뒷받침하도록 노래하기 전에 몇 마디 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하지 마라. 설교자가 자신이 하고 있는 바를 정확히 안다면, 혹시 모른다 하더라도 설교는 사람들이 예배를 떠나면서 끝나는 것이다. 찬양 인도자가 할 일은 사람들이 예배하도록 등 떠밀어 주는 것이다. 그런 건 간단히 한 문장으로 말하고, 음악에 열중하면 된다.

그렇다고 앞에서 말도 하지 말고 설교에 관한 말을 절대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찬양 인도자가 “설교”를 짧게 한 마디 하면 좋을 때가 있다. 하지만 설교 후에 바로 짧은 말로 또 설교하면 사람들이 소화하는 걸 막을 수 있다.


9. 설교 시간을 지켜 주어야 한다.

바로 여기서 모순이 되는 부분을 보게 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목회자로서 이기적으로 들릴 수 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나는 찬양 인도자들이 우리 목회자에게 하는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말로 예배해 왔고 이것이 예배의 중심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교회에 왔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한다. 노래와 설교를 적절히 맞추려고 노력하면서 예배의 요소를 신경 쓸 필요가 있다.


10. 모두가 음악에 이끌리지는 않는다.

우리 교회에서는 우리만의 노래를 많이 부른다. 그럴 때 멋지다고 생각하고, 더 그랬으면 좋겠다. 찬양 인도자가 자신의 작품에 손을 대어, 성도에게 복음성가를 문맥에 맞추어 사용하도록 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과도해지면 우리만의 기분으로 빠지기 쉽다.

교회에서는 현대음악과 찬송가의 균형이 필요하다. 너무 주관적이어서는 안 된다. 사명은 신중하게 대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종으로서 스스로를 다소 가볍게 생각하기도 해야 한다.


11. 예술가가 아니라 성도를 이끌어야 한다.

찬양 인도자로서 가진 소명과 독특한 능력 중에는 성도를 이끌고 북돋우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사용하는 음악의 형식과 방식도 포함한다. 그러나 찬양 인도자는 보통의 성도보다 예술가들로 둘러싸여 지낼 가능성이 높아서, “조금만 손을 대야지” 한 것도 보통 사람들에게는 극적이고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인내심을 가지고, 사람들이 찬양 인도자의 창의적인 영혼을 막으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내가 우리 교회에 대하여 말하는 게 싫겠지만, 우리 교회의 사람들은 그냥 그 말을 듣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리더십과 비전이 일하는 방식이다. 음악도 이와 똑같이 일한다. 음악이 사람들의 가슴과 마음을 찌르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많이 들어야 한다. 사람들이 정말 노래를 받아들이고 정말 좋아할 때, 찬양 인도자는 이런 노래에 싫증날 것이다. 목적을 가지고 계속 같은 것을 끈질기게 고수하고 너무 빠르게 바꾸지 말아야 한다.


12. 긍정해야 한다.

단점을 인정하고 강점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은 많은 역할을 위하여 아마도 좋은 조언이 될 수 있다. 나는 반대로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의 약점을 지적하고 강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넘기는 게 훈련이지만 많은 열매를 맺는다.

아내는 내 설교에 가장 열렬한 팬이다. 내가 항상 잘하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또 내가 사람들에게 일부로 내 설교를 비판해 보라고 하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아내는 사람들이 비판하도록 하고 단지 “긍정적인 부분을 주목하게” 한다. 아마도 우리는 우리의 목회자에 대하여 비슷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 목회자가 우리와 열렬한 팬과 같은 마음을 갖는다면, 장기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을 것이다. 우리가 여러 가지 면에서 발전할 수 있는 부분의 목록을 길게 늘어놓는다면, 누구나 성공까지 도달하게 할 수 없다.


13. 주제에 너무 몰입하지 말아야 한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여러 과정을 펼치지만, 목표는 모든 것을 총괄해야 쉽게 이룬다. 예배의 주제와 여러 과정이 우리를 위해서 있어야지, 예배 자체를 위해서 있어서는 안 된다. 


14. 설교에 대하여 목회자에게 항상 질문할 필요가 없다.

예배 준비를 위해 많은 찬양 인도자는 설교가 어떤 내용인지 알기를 원한다. 이는 분명 좋은 점이 있다. 그러나 내가 자주 찬양 인도자에게 얘기하듯, “성찬식으로 마치지 않는 설교는 나쁜 것이다.” 찰스 스펄전은 목회자에게 늘 모든 설교 끝에 복음으로 다시금 나아가도록 했다. 나도 이와 같이 하려고 노력한다.

복음은 말씀이 명한대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모든 설교는 복음으로 끝나야 한다. 문제는 모든 설교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이 찬양 인도자가 목회자를 도울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다. 시간이 부족하거나 복음과 분명하게 연결되지 않으면, 설교 뒤에 오는 노래를 통해 능력의 근원인 복음을 강조할 수 있다. 


여기까지가 내가 전하고자 하는 말이다. 여러분이 더 붙일 것이 있는가? “찬양 인도자가 목회자에게 바라는 것”을 쓸 용기를 가진 찬양 인도자는 없는가?


J. D. Greear 목사는 박사 학위 소지자로, 노스캐롤라이나의 롤리-더럼 “서밋 교회(Summit Church)”에서 목회하고 있다. “아웃리치 매거진(Outreach Magazine)”에서 미국 교회 가운데 가장 급성장한 곳으로 꼽힌 서밋은, 지난 8년간 성도 수가 4백 명에서 5천 명으로 늘었다. 서밋은 세계적으로 교회 개척에 크게 관심을 두고 있어서, 지난 40년 간 1천 개의 교회를 개척하였다. 저서로는 “Breaking the Islam code”와 “Gospel: Recovering the Power that Made Christianity Revolutionary”가 있다. 이 글의 원문은 Churchleaders.com에 게시된 "What Every Pastor Wishes His Worship Leader Knew"로, 문화선교연구원에서 번역, 편집하여 한국교회에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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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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