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문화선교트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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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문화선교트렌드



하나님 나라가 현실의 가치와 통념을 뒤집고 새로운 관계와 질서를 희망하게 한다면그것을 소망하는 사람들이 이 세대의 트렌드와 대세를 읽어내려 한다는 것이 어불성설 같다하나님 나라에 해마다 유행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며때로는 시대정신을 거슬러 개인과 사회의 급진적인 갱신을 요청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가장 일상적인 현실에서 시작한다평범한 한 개인에게도 정치는 엄중하고 경제는 생존을 좌우하는 이 때세계를 직시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는 공허한 관념에 불과하다마치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 토질을 연구하고 기후를 읽어내듯하나님 나라를 더욱 깊게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오늘의 유행도 알아야 하며 시대정신도 읽어내야 한다.

변화와 갱신이 필요한 시대특별히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희망을 선택해야 하는 시대에우리는 올해 각 분야의 대략적인 흐름을 먼저 짚는다분야별 전망이야 투박하고 거칠지만이후 문화선교 분야별 전망을 이해하는 데는 최소한의 도움을 줄 것이다.


1. 사회문화 분야

. 분노하는 을과 몸 사리는 갑, 공존의 모색

. 끈끈한 혈육의 정, 가족 가치의 의미 재조명

. 소셜 네트워크의 피로감, 세력 이탈과 안티족의 증가

. 내 이야기를 듣고 싶다. 작고 사소한 내러티브의 위대함

. 일상의 여유, 진정한 행복을 찾아서


2. 교계 분야

. 자발적 납세, 신앙의 공공성을 위한 실천

. 건물 없는 교회, 처치 플랜팅의 새로운 트렌드

. 공생하는 교회, 함께 가는 교회

. 생계를 위한 다른 직업, 목회자의 이중직

. 신학교를 넘어선 대안교육 열풍





1. 사회 문화 분야




via seoul

분노하는 을과 몸 사리는 갑, 공존의 모색

작년 대한민국 서점가를 강타했던 <21세기 자본>의 저자 피케티는 자본주의의 문제를 지적한다. 능력이나 노력보다 상속이 위력을 발휘하는 세습 자본주의와 불평등의 심화로 귀결될 경향이 다분하다는 것이다. 그의 예상대로 한국 사회도 양극화와 사회적 불평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최근 한창 회자되고 있는 갑을 논란이 그 반증이다. ‘갑질이란 사회적 강자가 상대적 약자에게 부리는 횡포와 권력의 오용을 지칭한다.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다만 예전보다 상대적 부의 격차가 심각하게 커진 상황에서 철옹성 같은 권력을 자랑했던 사람들이 언론의 집중 포화를 맞았고, 비난과 야유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이 달랐을 뿐이다. 예전 같았으면 참고 지나갔을 일도 있다. 그러나 부당한 일을 당한 사회적 약자 의 이야기가 회자되며 하나로 결집되는 여론의 힘이 갑의 권력보다 폭발적일 수 있음을 알아가는 중이다.

올해 전문가들은 한국 경제를 낙관적으로 보는 대신 생계와 생존 경쟁이 더 치열해 질 것이라 예측한다. 회사가 수익성을 높이고 예산을 줄이는데 사활을 걸면 걸수록 패배감과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이 늘어날 것이다. 줄어드는 가계 소득과 황폐해지는 기업 생태계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들, 쓰고 버리는 참담함의 아우성이 곳곳에서 더욱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수많은 감시의 눈과 여론의 힘을 깨달은 갑들은 상대적으로 사람의 시선을 좀 더 의식할 것이다. ‘갑질의 이름으로 행해졌던 수많은 생명 경시의 행위를 시작으로 상호 반성과 성찰이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다. 갑을의 이분법적 프레임을 벗어나 상호간 협력과 존중으로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찾으려는 크고 작은 움직임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via chosun.com

끈끈한 혈육의 정, 가족 가치의 의미 재조명

세월호 사건 이후 국가와 사회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안전에 대한 불안을 느끼며 살아간다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20147월 진행된 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인간 관계 신뢰도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을 신뢰한다고 응답한 사람은 단 21.9%에 불과하지만 내 가족을 꼽은 사람은 83.6%에 달한다. 가족 외에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없는 불신의 시대에 사회를 지탱하는 마지막 보루요 가장 보편적인 정서와 가치인 가족애의 재조명이 활발히 일어날 것이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가족 중심의 역사다. 민족이나 국가보다는 가족의 건재가 민초의 삶을 지탱해왔던 까닭에 한국인에게 혈육에 대한 애착과 의존은 남다르다. 한 개인의 입신양명보다 가족의 안위가 우선시하다 보니 가족 구성원의 희생과 상처가 버거운 짐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가족이란 기본적으로 어떠한 능력이나 경쟁이 무의미한 공동체이자 사랑과 보살핌의 안식처를 지향한다. 작년 <아빠는 슈퍼맨>, <아빠 어디가> 등의 TV 프로그램과 최근 흥행한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등은 가족의 본질적 의미와 가치를 일깨워주었다. 세월호 사건으로 늘 곁에 있어 소홀히 여기던 가족의 소중함을 새삼 깨달았다. 사회적 신뢰가 무너지고 언제 어떻게 사건 사고가 나에게 닥쳐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숱한 삶의 희노애락을 함께하는 삶의 원천으로서 가족을 더 중요하게 여길 것이다. 부모와 동거하는 가족이 10명 가운데 3명까지 줄어들고 평균 수명의 증가로 노노부양가족이 생겨나는 가운데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의 상호 이해와 소통이 보다 시도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탈근대적 상황에서 혈연과 역할을 확장하며 진행되는 다양한 가족 담론을 한국의 굳건한 혈연 중심의 문화가 어떻게 수용할 수 있을지는 올해에도 계속되는 과제가 될 것이다.







소셜 네트워크의 피로감, 세력이탈과 안티족들의 증가

등장 이후 눈부시게 발전한 SNS(사회관계망서비스)2015년도에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될 것이다. 이른바 안티 소셜네트워크의 활성화이다. 혁명이라 일컬을 만큼 SNS는 사람들의 생활을 바꾸어놓았으며 네트워크를 통해 연결되고 소통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많은 사회적 관계망 형성과 유지에 피로감을 보이면서 2015년도에는 탈네트워크 현상이 가속화될 것이라 예측된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여주기식 인간관계에서 벗어나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는 내밀한 공간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페이스북, 트위터 등 기존 SNS의 지나친 개방성에 지친 사람들이 친구 맺기를 단절하는 것부터 시작해 자신이 원하지 않는 흔적들을 지우는 서비스도 등장했다. 이러한 추세에 친밀한 소수의 사람들만 참여하는 폐쇄형’ SNS, ‘익명성이라는 차별화 전략을 앞세워 블라인드, 위스퍼(whisper), 아노모(anomo), 어보이드(avoid) 등의 서비스가 등장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전문가들은 관계의 과잉 연결에 대한 피로도 증대에 따라 안티 소셜네트워크 서비스의 선호가 매우 주요한 축으로 등장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SNS 유목민의 증가는 온라인을 벗어나 현실로 돌아가자는 탈네트워크화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 역시 SNS의 변형일 뿐이라는 평가도 있다. 진심 어린 소통을 찾아가는 대중의 모습 속에서 교회는 진정한 소통의 플랫폼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인가? 여전히 소통은 중요한 문화의 키워드다.

 

 




via kbs

내 이야기를 듣고 싶다. 작고 사소한 내러티브의 위대함

지난 해 인기 있었던 이야기는 백마 탄 왕자나 신데렐라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정치적인 이념이나 구호를 담은 큼직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평범한 소시민이라면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는 일상의 감정들, 특별할 것 없지만 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변화무쌍한 기분을 성공적으로 갈무리해낸 이야기였다. 우리의 삶을 담은 이야기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이야기를 만들어 낸 작가의 시선이다. 작가들은 비판적으로 접근하지 않았고, 냉소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격려 받고 싶은 사람을 격려했고, 위로 받고 싶은 사람에겐 따뜻한 말을 건넸다. 그래서 독자의 감정이입이 쉬웠다.

이제 이런 이야기들이 대세가 될 것이다. 한때 막대한 영향력을 지녔던 이야기들, 곧 세계에 대한 포괄적인 안목을 제공했던 거대담론, 현실을 넘어 초월적인 희망을 담은 서사, 객관성을 잃지 않으려는 지성적인 이야기의 인기가 예전만 같지 않을 것이라 예측된다. 이런 이야기들이 사람들의 일상에 닿기 위해선 전달 방식을 재고해야 한다는 의견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모든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이야기, 비판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마음에 울림을 주는 작은 이야기들이 관심을 끌 것이다. 작가, 배우, 정치인, 종교인, 연설가를 막론하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라면 올 한 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사람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아야 함은 기본이다. 이렇게 나온 말들이 값싼 힐링이나 달콤한 위로를 담은 희망 고문으로 전락해서는 안 되는 법이니, 이 각박한 세태에서 인간에 대한 진지한 탐색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문학에 다시 기대를 걸어보는 수밖에.






일상의 여유, 진정한 행복을 찾아서

10년 전 한 카드 회사의 행복하세요” CF가 이목을 끈 적이 있었다. 당시 행복이 의미하는 바가 부자였다면 이제는 다르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실을 저당 잡혀 살던 한국인이 현재의 행복을 말하기 시작했다. 무작정 바삐 앞만 보고 앞으로만 달려가는 것에서 조금 늦더라도 천천히 걷거나 멈추어 서서 여유와 행복을 누리려는 삶을 원하는 사람, 자기 자신과 가족, 주변 사람에게 관심을 두려는 사람이 늘고 있다.

나아질 줄 모르는 경기 불황과 고용 불안정은 생존경쟁을 더욱 치열하게 했고 성과를 중요시 여기는 사회를 더 견고하게 했다. 결국 끊이지 않는 것은 일일, 빨리 빨리, 그리고 야근, 월급과 함께 남은 것은 멀어진 가족과 현재 일상의 건조함이다.

연휴마다 떠나려는 사람이 줄을 잇는 것도 분주한 일상을 떠나 잠시 쉬고 싶기 때문일지 모른다. 이제 상업적이고 자극적인 것에 지친 사람이 소박하고 자연친화적인 삶, 느리더라도 단순하며 휴식과 여유가 있는 삶에 눈을 돌리는 중이다. 현재 일상을 누림의 대상으로 삼고 회피하고자 하지 않으려는 삶의 형태가 자리 잡고 있다. 거기서 주는 진정한 행복을 맛보고 싶은 것이다. 동시에 외부 평가에 따른 남들과 똑같은 천편일률적인 행복을 더욱 거부할 것이다. 오롯이 내가 즐기고, 느끼고 누릴 수 있는 일상의 행복을 더더욱 추구할 것이다.

적당히 벌고 아주 잘 사는’, ‘덜 벌고 더 행복하게’, ‘적게 벌고 적게 쓰는사람들,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시작되는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나서는 이들이 점차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2. 교계 분




자발적 납세, 신앙의 공공성을 위한 실천

정부는 2013년 소득세법 시행령을 통해 2015년부터 종교인의 소득을 기타 소득으로 분류해 원천징수하겠다는 방침이었다. 납부 시기를 1년 유예했다. 혹자는 현 정부에서는 물 건너갔다고 말하기도 한다.

종교인 과세에 찬성하는 자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대한민국인이면 세금의 의무가 있다는 원리를 이야기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삶의 원리를 따라 자신의 권리와 특권을 주장하지 말고 과감하게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종교인 과세에 반대하는 자들은 정교 분리의 원리에 따른 소득세 과세 추진 자체가 종교의 자유를 부인하는 형태라는 주장이다. 교회 헌금 집행에 따른 국가 간섭이라는 주장도 함께 한다. 그래서 중간 지점에서 교회의 원천 징수 및 보고 의무가 없이전임 목회자가 교회에서 받는 월정 사례비에 대한 세금만큼 스스로 납부하는 캠페인을 전개하자는 의견도 힘을 얻고 있다.

중요한 것은 해를 거듭할수록 사회가 기독교인에게 요구하는 것이 공공적 정의와 평화(Social Justice and Peace)에 대한 응당하고도 진실한 응답으로서 삶의 모습이라는 점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시민으로서 기독교인의 참다운 양식이다. 누군가의 요구에 따라서만 아닌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며 동시에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사회적 정의와 공공성을 담지한 삶의 태도를 정제하여 자발적으로 보여줘야 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은 다른 세계관으로 살아가지만 다른 세상에서 자신의 언어로만 살아가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인 과세를 두고 의도하지 않게 정부 비판론과 기독교인의 시민 사회의 책임 회피론에 휘둘리는 것도 경계해야 하기에 2015년 한 해 한국 기독교는 적극적으로 검토해 보아야 할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via footstepsinthedeep

건물 없는 교회, 처치 플랜팅의 새로운 트렌드

성경은 교회가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교제이며 주님의 몸이라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당을 교회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출석하는 교회가 어디 있으세요?”라던가 어느 교회 다니세요?”라는 질문은 교회가 건물이라는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런 인식은 교회당에 모여 이런저런 활동을 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큰 교회당에 모인 큰 무리가 큰 교회이며 위대한 교회라고 여기는 것이다.

거대한 교회 건축을 무리해서 진행하고 그 빚을 갚느라 허덕인다는 소식이 허다하다. 빚을 감당하지 못해 경매에 넘어가기도 하고 심지어 이단에게 팔리기도 한다. 커다란 예배당을 건축하면 성공한 목회로 여기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는 부정적 이미지도 적지 않다. 선교에도 별 도움이 되지 않고 그리스도인도 비판적으로 보는 경향이 많다.

점차 건물 없는 교회가 늘어나고 있다. 건물이 없다는 것은, 건축을 하지 않고 사역에 따라 필요한 대로 공간을 활용하거나 임대하여 일시적으로 사용하는 경우를 말한다. 심지어 가정에서 혹은 카페에서 예배를 드리고 모이며 개척을 시작하는 경우도 점차 늘고 있다. 단지 재정적 여유가 없어서만 아니고, 건물 중심의 교회보다는 가서 제자 삼으라는 사명, 곧 선교 중심의 교회가 더 성경적이라는 신학적 결단을 하는 사역자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건물 없는 교회는 새로운 교회 개척의 추세로 자리 잡을 것으로 보인다. 자비량 목회자가 늘어나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전문사역자가 특정한 전문 분야에 집중적인 사역 역량을 발휘하면서 새로운 교회가 출현하는 데 대부분 건물이 없는 공동체가 될 가능성이 크다. 총회와 노회는 앞으로 이러한 교회의 소속과 위치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건물 없는 교회의 실체를 인정할 신학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할 숙제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공생하는 교회, 함께 가는 교회

한 지역 사회에 있던 교회들이 다 같이 모인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교역자들의 친목 도모를 위해 운동을 같이 한다거나 유명한 강사를 초청한 집회에 이웃 성도들을 초청한 사례들이 있곤 했다. 간헐적으로 불우이웃돕기와 지역청소를 분담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좀 달랐다. 교단이 다른 교회의 제직이 한 교회에 모여 세미나를 가졌다. 이들 교회는 지역 관공서와 연계해 지역의 현안에 대해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로 했다. 지역 전도 활동도 함께 할 예정이다.

한 교회가 지역 사회를 섬길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빛과 소금일 수 있다. 그러나 여러 교회가 함께 하면 인적 자원과 물적 자본이 증가한다. 감당할 수 있는 일의 양도 늘고, 그 일을 좀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 게다가 섬김과 나눔이라는 디아코니아의 현장은 교회들 사이에 우정이 끈끈해지는 코이노니아의 장이 된다.

물론 교회는 각 교회마다 우리 교회가 좋은 교회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 바람이 있는 게 사실이다. ‘우리 교회만큼은 이웃의 어려움을 간과하지 않고 지역사회의 필요를 채우는 훌륭한 교회라는 칭찬을 듣고 싶다. 그래야 자긍심이 생기고 또 이런 약간의 우월감이 있어야 교회 성장에 대한 기대감도 생긴다. 문제는 모든 교회를 한통속으로 취급하는 불신자에게 이런 칭찬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라는 점이다. 지역교회와 한국 교회에 대한 신망이 높아지지 않은 채 우리 교회에 대한 신망만 높아질 수 없다는 것을 교회는 근 몇 년 동안 처절하게 깨달았다. 그래서 함께하는 교회가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이다. 함께해야 지역 사회의 곤경에 더 잘 대응하고, 함께함으로 함께 좋은 교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via cknews

생계를 위한 다른 직업, 목회자의 이중직

그동안 일부 목회자의 필요에 따라 이루어지곤 했던 목회자 이중직 논란이 올해 더욱 가열될 것으로 보인다. 미자립교회가 3분의 2를 차지하는 한국 교회의 상황에서 가족의 생계에 위협을 느끼고 생활 전선으로 뛰어드는 목회자가 날로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중직 교회법적 허용까지 신학적, 목회적, 현실적 차원 등 풀어야할 매듭이 아직 한참 남았다.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는다. 그럼에도 목회로 부르심이 조금 더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대개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한 직분, 성직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던 것처럼 목회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소위 세상적인 직업을 떠나 교회 전임 사역에 전념하는 게 일반적 통념이다. 어떠한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주님의 양을 위한 목양 사역을 감당하겠다고 들어선 길이지만 가족의 생계와 생존권의 보장이 어렵다는 현실에서 어쩔 수 없다는 것이 찬성 측의 입장이다. 이중직을 성도들의 삶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로 여기거나 선교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반면 목양의 우선순위의 전도 가능성, 목회자로서 정체성의 혼란이 있을 수 있다는 부정적인 면도 간과할 수 없다.

가열찬 찬반 논란에서 작년 예장고신 총회에서는 목회자 이중직이 안건으로 나왔고 예장 통합 총회에서는 자비량목회와 이중직 목회에 대한 안건이 상정되었다. 이미 이중직을 허용한 침례교를 제외한 다른 교단에서도 앞으로 법적 허용에 대한 논의가 있을 예정이다.

 





via cialkey

신학교를 넘어선 대안교육 열풍

한국 교회의 위기와 쇠퇴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신학 교육을 통해 해결책을 모색하려는 대안적 움직임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교단 중심의 신학교는 목회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이를 전제로 하기에 성도의 접근 자체가 어렵다. 성도의 신학적 관심과 지적 호기심을 채워줄 수 있는 교육 기관이 부재한 것이다. 최근 일부 목회자가 보여준 비윤리적 행위와 일반 사회와 동떨어진 교회의 문화와 가치관으로 인해 보수와 진보 신학의 극단적 패러다임을 넘어서 시대가 요청하는 주제를 건강한 신학을 통해 성찰하고자 하는 성도가 늘어나고 있다. 이제까지 목회자의 전유물로 여겼던 신학을 올바른 신앙과 신학에 대한 열망이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방향을 선회할 때이다.

학교처럼 강의를 전담으로 하는 곳이 있고 간헐적으로 단기간 아카데미와 세미나를 위주로 하는 곳도 있다. 대안 신학 교육 기관이 급증하는 것은 기존 신학 교육의 현실과 동떨어져 가고 있으며, 합리적 이성과 사고를 기반으로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성도의 요구가 있음을 보여준다. 기존의 신학교와 교회는 자신의 울타리를 넘어선다고 불편하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돌아보며 시대와 현장이 요청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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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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