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기쁨이 가득한 언덕.
가락재 영성원 <정광일 목사>를 만나다.
오랜만에 왔다. 6년전, 신학교 신문사 기자시절 개신교의 한국적 영성을 고민하다가 우연히 알게 된 가락재 영성원. 정 목사님과 햇살 가득한 창가에 앉아 신앙과 삶에 대해 나눴던 이야기도, 사모님이 내어주시던 차 한잔의 기억도 또렷하다. 그리웠나보다. 아니 그 무엇이 이곳을 그립게 했나보다. 고속도로를 타고 금방 와 버렸다. 순례자의 삶을 쫓고자 찾는 곳인데 마음의 준비조차 하지 못한 채 입구에 다다르니 보니 편리함과 빠름이 주는 무의미성을 또 다시 깨닫게 된다. 빠른 길이 아닌 돌아오는 길을 택할 것 그랬나보다. 깊어가는 가을 색으로 단장한 국도를 따라 느릿느릿 돌아올 것 그랬다. 돌아가는 길이 지름길인데.
어딜 바삐 다녀오는지 약속시간을 조금 지나 목사님이 오셨다. 요즘 그를 찾는 손님들이 늘었던지 신학생들과 함께 차에서 내린다. 고마운 일이다. 짧게 인사를 마치고 사랑채 옆 탁자에 마주 앉았다.
23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1991년 12월, 가락재 영성원을 문을 열었다. 유학까지 하고 온 젊은 목사가 첩첩 산중에 들어왔으니 주변의 반대와 어려움이 있었다. 그를 괴팍한 사람으로 취급하기도 하고 돈키호테처럼 홀로 거대한 무언가와 싸우는 이로 생각했다. 20여년이 흐르다보니 지금은 그의 고민에 귀를 기울이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한다.
“종교개혁자들 이후로 개신교가 열심히 개혁을 외치고 달려왔는데 정작 우리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기독교를 통합적으로 보면서 전체적인 입장에서 우리의 모습을 비춰보고, 스스로를 상대화해야 합니다. 특히 교회가 갖는 이미지가 무엇인지 성직자들이 갖는 이미지가 무엇인지 많이 고민해요. 가톨릭의 교황을 비롯해서 사제들이 주는 이미지와 개신교 목회자가 주는 이미지가 무엇인지 말이죠.”
정 목사는 그동안 개신교가 외적인 부분에 신경을 많이 써오면서 정작 자신의 뿌리와 영성에는 둔감했다고 지적한다. 연기자들이 화장과 성형으로 자신을 보여주려 한 것처럼 그동안 교회와 목회자들이 진짜 모습, ‘생얼’을 감춰두고 보여지는 이미지에 몰두한 것이 아닌지. 사람들앞에서 온갖 겸손과 거룩한 모양을 하다가도 돌아서서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기 바빴다. 삶이 분리된 신앙의 폐해를 모두가 보고 있지 않는가!
성장의 시대에서 성숙의 시대로
“처음 영성원을 시작했을 때와 지금을 비교해보면 교회적으로는 ‘성장의 시대’에서 ‘성숙의 시대’로 전환되었지요. 성장에는 필요한 자양분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상당부분 소실되었기에 개신교는 한동안 감소추세일 것입니다. 저는 성장의 끝물에서 조금 앞서 교회와 신앙의 질적 의미, 그리고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 의미를 고민했던 것 같아요.”
놀랍게도 영성원을 찾는 이들의 7-80%가 대형교회 성도들이고 한다. 좋은 교회에서 훌륭한 신앙 훈련 프로그램을 따라 열심히 달려왔지만 정작 자신은 성장하지 못했다고. 그동안 교회들이 성장을 외치며 달려오면서 성도들을 수단으로 대해왔지, 그들의 신앙적 성장과 삶의 회복에는 무관심해왔다고 지적한다. 한 성도는 그동안 교회의 비전과 목회자의 야망에 자신이 이용당한 것 같다고 성토했다고.
물론 성장과 성숙이 전혀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다. 성장을 추구하다가 성숙에 이를 수 있고, 성숙을 추구하다가 성장에 이를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신앙의 성숙보다 교회의 성장에 몰두해 왔다. 교회의 성장과 목회자의 비전이 중요했지 진정한 영적 성장과 양육은 부족했다. 성도들의 신앙을 돕는 일대일 양육이나 제자훈련 프로그램도 결국 성장을 위한 도구가 아니었던가. 성도들을 빨리 훈련시켜 또 다른 성장의 도구로 활용하기 급급했지 그들이 진정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게 하지 못했다. 주님의 제자가 아닌 교회의 제자, 목회자의 제자화를 부추긴 꼴이다
쉼 - 숨 - 섬의 영성
가락재의 영성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쉼-숨-섬’의 영성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연 속에서 진정한 안식을 누리며, 깊은 영적 호흡을 통해 올바로 서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때는 젊어서 그랬는지 ‘섬’에 목적의식이 있었어요. 다시 재기하고 일어서는 것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상황마다 세 글자의 초점이 조금씩 바뀌는 것 같아요. 요즘은 중간단계인 ‘숨’에 대해서 많이 고민합니다. 하나님의 호흡을 진하게 느끼고 들이키는 것, 자아의 불순물을 뱉어내고 새로움으로 충만해지는 것, 거듭난 영혼처럼 맑았게 씻겨 내고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는 상태에 침잠하려 노력하지요.”
정 목사는 ‘숨’의 깊이와 충만함에 이를 때 ‘쉼’과 ‘섬’이 자연스럽게 되어지는 것이고 말한다. 지난 10월에 끝난 아시안 게임에서 ‘평화의 숨결’이란 용어를 썼는데 일반사회에서 ‘숨결’이란 용어를 사용한데 상당히 놀랐다고. 교회는 아직도 기도를 영적인 호흡정도로만 여기는데 일상의 삶을 위한 진한 숨결로 인식되지 않는다면 ‘숨’의 영성이 삶에서 멀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루아흐’의 영성을 깊이 생각해 볼 때가 온 듯 하다.
‘예수를 신앙한다’는 것의 의미
요즘은 설교를 듣는 것보다 설교를 보는 시대이다. 회중들이 설교자의 말을 듣는 것 같지만 그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가르침과 행동에 문제가 없는지를 살핀다. 목회자가 예수를 따라 사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시대에 예수를 신앙한다는 것의 의미를 물었다.
“믿음은 예수님과의 일치입니다. 때마다 일마다 그분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이지요. 일치는 예수님의 삶, 즉 존재의 일치, 십자가와 부활의 삶의 일치에요. 바울 신학의 십자가와 부활을 강조하는데, 바울이 사실 예수님을 못만났기에 십자가와 부활을 강조할 수 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복음서는 예수님의 전체를 조명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복음서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정 목사는 믿음이 좋다고 할 때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사는 것에 대한 내용이라고 한다. 스스로도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의 구호에서 극복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고 고백했다. 전도용 구호로도 나름 의미가 있지만 극단주의 이원론에서 벗어나 예수의 삶을 따라 사는 것이 필요한 요즘이다.
믿음은 카리스마적인 은사나 전도용 구호가 아니고 일상의 자연적 삶이다. 토마스 아 캠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처럼 말이다. 지난 여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을 통해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이 무엇이고 종교의 생명력이 무엇인지 보지 않았는가? 개신교 목회자와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를 자문해야 할 시점이다. 끝으로 정 목사는 영성원을 통해 사람들의 숨통이 좀 트였으면 한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답답해 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모든 곳에서 숨쉬기 조차 힘들어요. 이곳이 숨통이 좀 트여주는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몇일 쉬면서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력을 누리고 돌아가면 일상의 충전소가 되었으면 합니다.”
글쓴이 김승환 연구실장
가락재 영성원 홈페이지 http://garacjae.n4.cc/
주소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한서로375번길 33-145 (위곡리 128)
연락처 031-584-2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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