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 오늘 :: 결국은 손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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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앉아 글을 쓴다. 아니 요즘은 글을 ‘쓴다’가 아니라 ‘친다’고 표현해야 맞다. 불과 20여 년 사이에 글 ‘쓰기’ 행위가 변모했다. 한 손에 연필을 쥐고서 원고지의 칸을 메워나가던 형태에서 두 손을 활용해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형태로 말이다. 이러한 변화에 수반된 문명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바로 ‘에너지’의 과잉이다. 글을 ‘쓰던’ 시절에는 오로지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되었다.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쓰면 그만이었다. 그랬던 것이 요즘은 컴퓨터의 전원 스위치부터 누른다. 요컨대 글을 ‘치는’ 시대에는 값비싼 컴퓨터를 갖춰야 함은 물론, 이 물건을 작동하기 위해 초대형 원자로에 의존해야 하는 것이다.

 

365×24, 항시 대기

물론 이 때 컴퓨터의 플러그가 콘센트에 꽂혀 있지 않으면, 제 아무리 성능 좋은 녀석이라도 고물 먹통에 지나지 않을 것이므로, 플러그가 제대로 꽂혀 있는지 확인하는 게 우선이다. 하지만 바쁜 현대인은 그때그때 플러그를 꽂았다 뺐다 할 여유가 없다. 하여 자주 쓰는 전기제품은, 마치 주인이 램프를 문지를 때마다 무조건 튀어나와야 하는 ‘지니’처럼, 버튼만 누르면 언제든지 켤 수 있도록 대기 중이기 십상이다.

주위를 둘러본다. 글을 친답시고 컴퓨터를 켠 지가 한참이다. 하지만 곧바로 글을 치는 경우란 거의 드물다. 하릴없이 이메일을 체크하고, 괜스레 찜해둔 상품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뺐다를 반복한 뒤에야 글을 치는 행위로 돌아온다. 그 사이에 제목에 낚여 클릭한 기사는 또 얼마나 허접하던지. 환하게 켜져 있는 형광등, 하루 종일 돌아가는 냉장고, 24시간 대기중인 세탁기, 텔레비전, 오디오, 전자렌지…. 그밖에 선풍기, 헤어드라이어, 휴대폰 충전기, 전화기, 커피포트 등 온갖 기구들이 이른바 ‘전기’를 먹고 사는 녀석들이다. 작년 여름,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통에 에어컨을 사고 싶어 얼마나 안달했던가. 그러고 보니, 전기 에너지 없이는 하루도 살지 못하는 ‘문명인’이야말로 정말 구제불능의 취약한 동물이지 싶다.

 

고스란히 돌아오는 것들

헌데 문제는 그렇게 귀한 줄 모르고 펑펑 써대는 흔하디흔한 전기가 결코 안전하지 않을 뿐더러 무한하지도 않다는 사실이다. 올봄에 일어난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보라. 가히 ‘재앙’ 수준이다. 편서풍 덕분에 우리나라는 안전하다고 아무리 정부에서 홍보전을 펴도, 국민 대다수가 믿지/속지 않는다. ‘방사능 비’에 대한 공포는 산성비에 비할 바가 아니다.보슬비만 내려도 남녀노소 모두 우산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다. 그 난리 통에 사람 말고 다른 생명체들은 꼼짝없이 방사능 비를 맞았다. 이들이 가쁘게 뿜어내는 호흡에 함유된 방사능은 마침내 돌고 돌아 다시금 사람 몸에 축적될터이다. 이 순환의 이치를 모르고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제 한 몸 보신하기에 바쁜 인간을 내려다보며 하늘이 얼마나 우습다 하겠나.

이번이 처음인 척 요란을 떠는 모습도 가증스러울 것이다. 1979년 3월에 일어난 미국의 스리마일 섬 원전사고와 1986년 4월에 일어난 옛 소련의 체르노빌 원전사고를 통해 충분히 깨닫지 않았냐고 호통을 칠 법도 하다. 하기야 이듬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유제품 회사인 남양유업이, 아기들이 먹는 이유식을 제조하며 체르노빌 방사능에 오염된 식품원료를 들여와 만들었을 정도이니, 더 말해 무엇 할까. 심지어 당시 식품안전법에는 방사능 항목이 없다는 이유로 그 회사의 이유식이 ‘합법’ 판정을 받았으니, 모르고 먹인/먹은 사람만 억울하다.

 

손의 회복을 시작할 때

다시 ‘손’ 이야기를 해보자. 그러니까 뭔가를 쓰기 위해서 자판을 두드리는 대신에 연필을 잡던 그 손 말이다. 그 시절 내 손은 봄이면 쑥을 뜯고, 여름이면 아카시아 줄기로 동무의 머리를 파마해 주었다. 가을에는 감자를 캤고, 겨울에는 고드름을 땄다. 메뚜기를 잡아서 강아지풀에 끼워 구워먹기도 했으며, 흙을 만지고, 물놀이를 하고, 실뜨기를 하고, 풀피리를 불었다. 어느 시인의 적절한 표현대로 우주와 나 사이에 손이 있었다. 자연과 교감하고 온갖 놀이를 창조해내

는 대단히 생산적인 활동이 모두 그 손을 통해 이루어졌다. 과연 어여쁜 손이었다.


그랬던 손으로 지금은 온종일 생명 없는 것들만 만지작거린다. 운전대, 휴대폰, 컴퓨터, 리모컨…, 도대체 이 손으로 얼마나 ‘쓸 데 있는’ 짓을 했을지 자괴스럽다. 창조적으로 생산하던 손이 탐욕스럽게 소비하는 손으로 바뀌었다. 이 손이 가장 즐거운 순간이란 더 이상 자연과 접촉하는 때가 아니다. 동무의 손을 잡고 함께 뛰어노는 때가 아니다. 오로지 돈을 만질 때만, 그 돈으로 원하는 상품을 구입할 때만 비로소 흡족하여 부지런히 움직이는 교활한 내 손이여!

공관복음에 모두 소개되는 치유 기사 중에 ‘손 마른 사람’ 이야기가 나온다(마 12:9-13; 막 3:1-6; 눅 6:6-11).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던 중, 오랫동안 손이 말라 있던 사람을 불쌍히 여겨 고쳐주셨다는 내용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기적은 바로 손의 회복이 아닐까. 머리로는 한 세상 살면서 ‘생태발자국’이든 ‘탄소발자국’이든 덜 남겨야 한다는 것, 잘 안다. 입으로는 생태가 어떻고, 생명이 어떻고, 환경이니, 자연이니, 이른바 의식 있는 말들을 잘도 쏟아낸다. 하지만 끝내 손이 말썽이다. 이 손에 붙은 습속이 항시 머리와 입을 배반하는 게 문제다.

 

호모 파베르(Homo faber)라 했던가. 인간이 그 손으로 만들어내는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형상성을 구현하는 것들이어야 마땅하다. 창세기 1장 28절은 땅과 연결된 손에게 주어진 명령이다. 인간은 땅을 다스리라는, 땅에 몸 붙여 사는 모든 생명체를 돌보라는 하나님의 위대한 위임 앞에 서 있다. 그러니 어쩔 텐가. 영영 움켜쥔 채로 말라 버린 손을 하고서 망연자실 그냥 살 셈인가. 아니다. 참된 구원은 마른 손이 펴져야 이루어진다. 그 손길 닿는 모든 존재마다 새생명을 얻게 만든 예수의 손이 오늘 내 손 위에 포개지기를 간구한다.

 

구미정|여성과 자연, 생명과 평화를 화두로 삼고 다양한 인문학적 글쓰기를 통해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기독교윤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생태여성주의와 기독교윤리>, <한 글자로 신학하기>, <핑크 리더십> 등 여러 책을 썼고, <교회 다시 살리기>,<작은 교회가 아름답다>, <아웅산 수지, 희망을 말하다>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요즘 <주간기독교>에 매주 ‘두 글자로 신학하기’를 연재하는 동시에 CBS TV 성서학당에서도 강의하는데, 이렇게 ‘바쁜 척’하고 살아도 되나,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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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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