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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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다른 현실에 대한 용기

<설국열차>(봉준호, SF/액션/드라마, 15, 2013)

 

<설국열차>는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다. 할리우드로 진출한 봉준호 감독의 처녀작이기도 하지만 또한 영화 제작 후기와 시사회 후의 세계 언론과 평론가의 호평이 다양한 매체에서 회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450억이라는 제작비만으로도 놀라기에 충분하다. 원작은 프랑스 작가 장 마르크 로셰트(Jean-Marc Rochette)의 만화이다. 봉준호 감독은 원작의 아이디어와 일부 내용을 빌려오긴 했어도 자시만의 스타일로 전혀 새로운 느낌의 영화로 만들었다.

먼저 <설국열차>의 이야기를 성경에 빗대어-하나의 파라프레이즈로-독해한다면 이렇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파라프레이즈

 

하나님은 세계의 시작을 여셨다. 만물의 모든 시작은 하나님에게서 비롯한다. 삶의 모든 계기는 하나님의 뜻으로 시작할 뿐만 아니라 계속적인 삶 역시 하나님의 뜻에 따라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이 시작하게 하신 것들을 자신의 뜻과 가치관에 따라 판단하며 재구성하면서 죄에 빠진다. 인간이 지은 죄의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는데,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 종말을 예고하셨다. 인간은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생존의 욕구는 더욱 강해지며, 위기를 극복하려는 대책을 강구한다. 새로운 이론이 제기되고, 새로운 세계가 건설되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우선적인 가치로 여긴다.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나 생명이 계속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다.

인간이 세운 대책이 주는 유익이 모두에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국가는 빠른 재건을 위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자들을 중심으로 정책을 펼치며, 가난한 자와 약자의 존재감과 가치는 명분상 강조할 뿐, 사실은 그들의 생존을 위해 필요하다고 여기는 범위 내에서만 인정할 뿐이다. 결국 가난한 자와 약자는 강자와 가진 자를 위한 희생물이 될 수밖에 없다. 체제 유지를 위해 현실을 공고히 할 수 있는 각종 이념이 고안되고, 권력은 감시와 처벌의 방식을 통해 행사된다. 신분은 대물림되어 이동과 상승이 불가능해진다.

대체로 사람들은 자신들이 직면하는 현실을 유일한 삶의 가능성으로 여긴다. 이것을 간파했던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통해 이 사실에 이의를 제기한다. 마치 동굴 입구에 등을 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림자를 실재로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그러나 동굴 밖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 빛의 존재를 말할 뿐만 아니라 동굴이 유일한 세계가 아님을 주장하고 또 계속 설득한다.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지성적인 노력이 필요하고 또한 동굴 밖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의지의 전환과 노력이 필요하다. 진실을 알고 인정하며 받아들이는 일이 쉽지 않거니와, 무엇보다 돌이켜 새로운 길을 간다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다. 용기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동안 체제를 지지해주던 이론에 순응하지 않으면, 체제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은 위험을 예고하면서 혹은 동굴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을 체제 전복자로 간주하면서 제거하려 하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가 현실에 매여 사는 이유는 단지 현실이 주는 안락함 때문만은 아니다. 불만으로 가득하다 해도 현실과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 혹시 누군가가 말을 해주어도 이미 학습된 불가능성 때문에 처음부터 좌절하거나 혹은 현실을 지배하는 각종 이론들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수용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의지의 180도 전환이 힘든 까닭이다. 현실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원칙에서 벗어나는 일이며 죽음에 해당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플라톤은 동굴 밖으로 나올 수 있기 위해 감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뿐 아니라 실재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이성의 사용을 주장한다.

동굴에서 벗어날 수 있기 위해 플라톤이 이성의 가치와 사용을 역설했다면,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그것은 신앙이다. 신앙은 현실이 아닌 또 다른 현실의 존재가 있음을 믿고,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그것을 증거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1:1)

그러나 신앙을 갖고 사는 삶이 그렇게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뚫고 나가야 할 역경이 있는가 하면, 현실을 어둡게 하고 또 왜곡하거나 변질시키려는 시도가 많고, 유혹하는 것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우리가 왜 또 무엇을 위해 사는지 조차 의심하게 만드는 일들이 많다. 정체성에 큰 혼돈을 불러일으키고, 경우에 따라서는 목표에 이르기도 전에 숨을 거두기도 한다. 감각적인 현실을 전부로 알고 사는 사람들 틈에 끼어 살면서 신앙이 추구하는 또 다른 현실을 망각하며 살기도 하고, 때로는 알고 있기는 해도 그곳으로 가는 길이 험난하여 절망하거나 용기를 내어 감행한다 해도 중도에 포기한다. 게다가 나의 형편과 처지, 모든 생각과 말 그리고 행위들을 설명하는 정치적, 심리학적, 철학적, 사회학적, 종교적 이론들이 우후죽순으로 제기된다면, 굳이 성경의 가르침을 몰라도, 또 다른 현실의 가능성을 알지 못해도 충분히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호라 나는 곤곤한 사람이로다. 누가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낼까라는 사도 바울의 탄식은 바로 이런 환경에 처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사람으로서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육신에 갇혀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현실을 추구하는 영혼이 탄식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다.

도대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현실과는 다른 세계의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어떻게 그 세계로 나아갈 수 있으며 그 세계 안에서 안식할 수 있는 걸까?

사도 바울은 탄식하며 묻는 가운데 스스로 대답을 주는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약속에 따라 사흘 만에 부활하여 승천하시고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아계신 분이시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혆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게 되었고, 자신이 비록 두 개의 법 사이에 끼어 살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로 인해 주신 구원의 약속을 받고 있음을 믿고 고백하며 감사한 것이다. 이 고백은 한편으로는 종말론적인 성취를 기대한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살아있는 동안에는 현실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현실에 머물며 살면서 또 다른 현실을 간헐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나마 경험하며 살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또 다른 현실을 보는 신앙의 안목이며, 또한 언제라도 현실을 넘어 하나님의 현실로 넘어갈 수 있는 용기를 갖는 것이다. 그 가능성은 알에서 깨어나는 고통을 이겨내는 것이며, 유일한 현실이라고 믿고 있던 열차를 파괴하고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영화 이야기

 

이해하기가 까다롭다고 생각해서 원활한 영화 이해를 돕기 위해 영화 이야기에 앞서 성경 이야기를 바탕으로 영화의 의미를 음미해보았다. 이제는 영화의 내용과 관련해서 이야기하면서 좀 더 영화에 가깝게 접근해보자.

 

<2012>의 연장인가?

현재 지구촌에는 각종 문제로 위기감이 고조되어 있다. 환경에서부터 경제와 평화와 빈곤과 전쟁 그리고 핵 등. 지구촌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들이다. 현명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붕괴될 염려와 불안이 팽배하다. 위기의식의 정도가 지역과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해도 글로벌 현상이다. 영화는 환경위기를 소재로 다루면서 문명의 위협적인 측면과 자국중심적인 국가 정치와 인간의 욕망을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메시지를 생산해 왔다. 그중에 롤란트 에머리히 감독의 <2012>는 지구 종말을 소재로 삼고 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는 지구 종말 이후에 살아남을 사람으로 권력과 재력을 가진 자들만이 선택될 수 있음을 폭로한다. 과연 그것은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기 위한 대안으로 적합한 것일까? 적자생존의 논리에 따르는 것은 아닐까? 에머리히 감독은 아마도 그런 세상의 가능성을 염려했던 것 같고, 그런 현실을 영상으로 제시하면서 역설적으로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경고하였다. 역사가 반복되는 부분이 없진 않아도 지구 종말 이후의 삶조차 부조리했던 과거의 반복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이다. 에머리히 감독의 의도는 지구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은 잘못된 세계관에 따라 새로운 삶을 구성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임을 역설하는 것이었다.

이야기의 얼개는 다르더라도 <설국열차> 역시 지구 종말을 소재로 삼고 있으며 또한 <2012>와 유사하게 이해될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2012>에서 경고에만 그친 메시지를 이야기 틀을 바꾸어 그 이후의 시간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심각한 지구 온난화 대책에 대한 실패로 지구에 종말 상황이 왔다는 것을 전제하고 이야기를 전개하기 때문이다. 지구 종말 후에 살아남은 자들에게서 일어난 이야기라는 말이다. <2012> 마지막 장면에서 방주에 몸을 싣고 떠나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오는데, 노아의 방주에서도 마찬가지지만 그곳에서는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는데, 방주에 해당되는 것을 기차로 대체했다고 생각한다면 <설국열차>는 잘못된 세계관을 바탕으로 건설되는 세계의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궁금증을 풀어주고 있다고 여겨진다. 인간 위에 인간이 군림하는 세계가 아닌 자연의 일부로서 살아가는 모습을 이상적으로 그리고 있다.

 

내용요약

때는 지금으로부터 그렇게 멀지 않은 2031. 온난화 현상으로 세계는 위기감에 사로잡혀 있다. 문명에 대한 욕망을 내려놓기보다 욕망의 지속을 위해 내놓은 해결책이 실패로 돌아가고, 설상가상으로 지구는 빙하기로 들어가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된다. 유일한 생존의 가능성은 윌포드(에드 해리스 분)가 만든 대형 열차밖에 없다. 기차 설계자로서 그가 제작한 열차는 지구 종말의 순간에 사람들을 구원할 방주이다. 열차는 자급자족이 가능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으며, 결코 멈추지 않고 달릴 수 있는 영구기관이 장착되어 있다. 윌포드의 열차는 더 이상 다른 대안이 없는 환경에서 삶의 유일한 가능성이다. 그곳에서 그는 구원자요 위대한 통치자로 추앙받는다. 생존을 위해 무작정 올라탄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권력과 재력이 있는 사람들도 있다. 열차는 맨 앞쪽 칸에서부터 뒤로 가면서 신분과 계급으로 분류해놓았는데, 재력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주로 앞쪽 칸에 머물고, 정식 승차권이 없이 무작정 승차한 사람들은 꼬리칸에 수용된다. 처음에는 먹을 것도 주어지지 않아 꼬리칸 승객들은 서로를 잡아먹는 비참한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 좁은 공간과 제한된 자원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열차내 사람들의 생존을 위해, 곧 질서와 균형을 위해 꼬리칸 승객들을 철저히 통제하면서 윌포드는 자신의 뜻을 이뤄나간다. 윌포드는 열차 밖의 삶이 가능하지 않고 오직 열차 내에서만 생존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성인들에게는 공공연한 생체실험 결과를 통해 주지시키고 그리고 아이들에게는 교육을 통해 주입한다. 사람들에게 열차 밖의 세계는 전혀 현실성이 없는 그저 과거의 추억이며 그림일 뿐이고, 끔찍한 트라우마이며 죽음의 세계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열차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고 교육하면서 일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세계의 축소판이다.

한편, 모든 면에서 차별대우를 받는 꼬리칸 승객들의 불만은 계속해서 폭발하여 폭동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것 역시 윌포드와 그의 친구로서 전략에 따라 꼬리칸으로 간 길리엄(존 허트 분)의 사전 공모에 따른 것이다. 예컨대, 열차내의 급증하는 인구를 조절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폭동이 일어나도록 했는데, 수시로 전달되는 붉은 색 바탕의 쪽지는 행동의 의미를 던져주는 것이기에 폭동의 성공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을 더욱 높여주었다. 그러나 폭동이 일어날 때마다 사람들은 정해진 숫자만큼 무참히 제거된다. 그럼에도 엔진이 가동되고 또 열차 내 다른 사람들의 삶을 위해 열등한 사람들이 생존해야 할 필요성을 인지한 윌포드는 그들이 꼬리칸에서 생존해갈 수 있도록 음식을 제공하고 또한 길리엄을 통해 생존에 필요한 가치관과 이념을 제공한다. 다시 말해서 서로를 잡아먹으며 생존하는 것보다는 서로가 서로를 위해 희생하는 삶의 모습을 제공함으로써 꼬리칸 승객들의 생존 가능성을 높인 것이다. 꼬리칸 승객들이 사태 전환의 가능성을 얻기 위해 엔진이 있는 앞 칸을 향해 나아갈 때까지 사람들은 각종 삶의 형태가 이뤄지는 칸을 거쳐 통과해야 한다. 계속적인 방해가 있고 또한 그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안락함과 풍족함을 누리며 머물 수 있는 칸이 이어지지만, 그들의 목적지는 엔진칸이기 때문에 결코 멈출 수 없다. 많은 희생 끝에 마침내 커티스(크리스 에반스 분)는 엔진칸에서 윌포드를 만난다. 그곳에서 커티스는 꼬리칸 승객들이 결국 앞 칸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도구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의 모든 행위가 다 윌포드와 꼬리칸의 지도자로 추앙 받던 길리엄에 의해 계획된 일이었음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마침내 열차 밖의 세계에서도 생존할 수 있다고 믿었던 남궁민수(송강호 분)에 의해 열차는 폭파되고, 유일하게 살아남아 열차 밖으로 나온 두 아이와 산 중턱에 있는 백곰의 모습은 그동안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열차 밖의 삶이 사실이 아니고 세뇌된 결과였음을 알게 된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임을 말하는 것 같은 마지막 장면이 매우 인상 깊다.

 

영화 이해

 

지금까지 기술한 내용의 이야기를 통해 영화가 문제로 삼고 있는 점은 열차 내의 계급과 신분 사회와 철저하게 통제된 사회, 그리고 차별화된 삶을 당연시하며, 정당성을 묻지 않고 오직 이런 삶을 가능하게 하는 영원히 멈추지 않고 달리게 하는 엔진에 대해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심지어 인간을 엔진의 한 부속품으로 전락시키는 윌포드의 세계관이다.

그는 생존을 위해 질서와 균형을 최우선의 가치로 생각한다. 사람은 자기에게 할당된 위치에 머물러 있으면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도자의 세계관을 위해 통제와 조작과 억압과 착취와 인권유린을 당연시하는 사회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열차내의 생명을 보호하고 끊임없이 달릴 수 있게 하는 동력인 엔진을 보호하고 또 계속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기차는 멈추지 말고 달려야 하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엔진을 보호하고 또 계속 가동할 수 있기 위해 인간들은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해야 한다. 심지어 엔진의 일부로 사용될 수도 있어야 한다. 실제로 엔진의 결함이 발생하자 윌포드는 어린 아이들을 엔진의 일부로 삼는 것을 당연시한다.

윌포드의 세계관은 또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원초부터 차단한 폐쇄된 세계관이다. 그의 세계관은 차등화된 칸으로 이뤄진 열차로 구현된다. 각 칸은 두터운 벽과 쉽게 열 수 없는 문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의 기차와 세계관은 지구 환경이 극도로 위협적이고 다른 삶의 가능성이 없을 때는 매우 유효한 것이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아무리 이론이 폭력적이고 또 정의롭지 못하다고 해도 모두가 그 이론에 따를 이유가 충분했다. 엔진은 그의 이론을 지지할 뿐만 아니라 열차내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었다. 따라서 처음과는 달리 열차내의 삶은 엔진을 위한 삶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인권이 침해될 뿐만 아니라 정의롭지 못한 열차 내 구조 때문에 사람들의 불만을 결코 잠재울 수 없었다. 결국 열차 폭파와 함께 윌포드의 세계관에 따른 세계 건설은 물거품이 된다. 이런 세계관을 무너뜨린 것이 윌포드의 계획에 따라 반란을 일으킨 자라는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결국 자기의 덫에 걸려 넘어진 세계관이다. 이런 세계관에 대해 봉준호 감독은 강력한 이의제기를 한 것이다.

 

감독의 의도를 확인함과 동시에 영화를 묵상하면서 얻는 질문이 있다. 윌포드의 세계관은 현실에서 도대체 누구의 것을 대변 혹은 반영하는 것일까? 영화 이해는 이 세계관의 실체를 밝히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다양하게 이해될 수 있는 부분임을 밝히면서, 또 앞서 성경이야기에 빗대어 이해를 시도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잘못된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비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단서들이 포진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윌포드와 그의 세계관을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열차의 설계자요 제작자인 윌포드는 세계를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려는 사람이다. 이것은 처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가졌던 태도와 동일하다. 이런 사람들이 주목을 받는 것은 세상이 위기에 사로잡힐 때이다. 혼돈의 시대일수록 지도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우후죽순으로 나타나는 법이다. 위기를 극복하고 생존의 가능성을 찾기 위해 잘못된 세계관을 가진 지도자들을 따르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주종의 관계가 형성되고, 그 안에서 자신을 이해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도구들을 공급받게 된다. 종교권력은 이런 과정을 거쳐서 형성된다. 열차는 지구 종말의 상황에 직면해서 생존의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게 일종의 새로운 삶의 환경이며 구원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엔진에게서 나온다. 엔진은 시스템이 기능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다. 그것은 이론일 수 있고, 도그마일 수 있으며, 신념 혹은 이데올로기일 수도 있다. 식사와 함께 건네지면서 꼬리칸 승객들의 정의에 대한 기대감과 실현 가능성을 높여주는 쪽지는 희망의 메시지다. 쪽지에 씌어있는 라는 말은 목적지를 향한 여정에서 일어나고 또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겪어야 할 시련을 예고하며, 매 칸에서 볼 수 있는 쾌락과 안락함은 앞 칸으로 전진하는 자들의 발을 붙잡는 유혹이다. 윌포드 찬양 일색의 아이들 교육은 열차내의 세계관을 지속하고 또 공고히 하는 데에 기여한다.

이로써 대체로 감을 잡았겠지만, 영화적인 묘사에는 기독교적인 상징으로 가득하다. 영화가 비판하고 있는 윌포드의 것으로 나타난 세계관의 단서는 명백히 왜곡된 형태이긴 해도 기독교적이다. 봉준호 감독은 서구인들에게 비교적 친숙한 기독교 상징을 통해서 잘못된 세계관의 폐해와 한계를 비판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봉준호 감독의 반 기독교적인 사상을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없는 것은 윌포드의 세계관으로 표현된 것이 기독교 세계관에 부합되기도 하면서도 많은 부분 어긋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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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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