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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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위에서 일어나는 비극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2>(오멸, 드라마, 15, 2012)

 

 

이념 차이에서 비롯하고 북한의 침략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수십 차례의 양민학살의 불명예를 역사로 남겨놓았다. 어느 한 쪽의 경우만은 아니었다. 남과 북 모두가 가해자요 피해자였다. 사건을 누가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고 있어서 사건의 진상이 여전히 규명되지 않은 것들이 많이 있으며, “노근리 사건처럼 매체를 통해 폭로되어 여론에 밀려 진실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는 사건도 있다. 이 사건은 충북 영동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자행된 양민 학살이며, 언론에 의해 밝혀진 후에 미국 클린턴 대통령은 뒤늦게나마 유감의 뜻을 표명했다. 영화(<작은 연못>, 이상우 감독, 2009)로도 만들어져 사회적인 관심을 높였는데, 배우 전체가 노개런티로 출현해 화제가 된 영화였다. 물론 전모는 아니더라도 사건의 진실이 어느 정도 밝혀진 것도 있다. 제주4·3사건이 대표적이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발의에 따라 2000112일에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은 제정되었다. 제주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희생자와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함이었다. 이 법은 제주4·3사건을 "19473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43일 발생한 봉기사태와 그로부터 19549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양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사건의 발단과 경과, 그리고 그 때문에 발생한 결과, 특히 양민 학살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3년 국가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이뤄졌음을 인정하고 국가 차원에서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를 하였다. 제주도민의 명예회복이 이뤄진 것이었다.

 

명예회복과 더불어 기념을 위해 평화공원이 조성되었고, 다양한 매체와 방식으로 진상을 접할 수 있는 기념관이 건립된 상태에서 굳이 비극적인 사건에 관한 영화가 만들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영화를 분석하면서 그 이유를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지슬>은 공감을 위한 매체로서 영화의 기능을 십분 발휘하고 있다.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역사는 언제나 차가운 기억(cool memory)에 불과하다. 기록되어 있고 기억하고는 있으나 더 이상 내 삶에 의미를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아픈 역사에 대한 기억은 단지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뜨거운 가슴으로 기억되어야(hot memory) 잘못이 결코 반복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늘 나에게도 의미 있는 사건으로 남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지슬>은 제주4·3사건이 우리의 뜨거운 기억으로 남을 수 있게 하려고 한다. 비록 당시 사건의 전모를 방대하게 다루지 않고 상징을 매개로 제주도의 한 마을인 동광리에 집중하여 다루고 있지만, 우리는 영화적인 재현을 통해 당시 제주도민에게 무엇이 일어났는지, 제주도민은 당시를 어떻게 경험했는지, 진압군은 어떤 생각과 태도로 사건을 대했는지를 어느 정도는 실감 있게 경험할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비록 시간과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다 해도 당시의 상황을 공감할 수 있다.

둘째, <지슬>은 영화의 사실 재현적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한 수작이다. 대체로 영화를 통해 지난 역사, 특히 깊은 상처로 남아 있는 사건을 재현할 때는 잘해도 욕먹고 못해도 욕먹는 법이다. 지난 역사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된 사건인 경우는 더욱 그렇다. <지슬>은 적어도 아픔을 가진 역사를 재현하는 영화로서 가질 수밖에 없는 딜레마를 훌륭한 연출로 잘 극복한 것 같다. 선댄스 영화제 최고상인 '극영화부문 심사위원대상'을 비롯하여 여러 영화제 수상 이력을 보아도 알 수 있지만 다양한 측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흑백영화임에도 상징을 통해 표현된 장면들은 당시의 분위기와 지역적 특성이 갖는 느낌을 전해주는 데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강력한 인상을 주고 있고 또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제사의 형식(신위, 신묘, 음복, 소지)을 갖도록 한 연출은 사건 자체를 대하는 감독의 태도를 엿볼 수 있게 하는데, 오늘 우리가 당시의 사건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와 관련해서 관객을 설득하는 데에 있어서 매우 현출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다분히 토속신앙에서 말하는 소위 원혼을 달래는 씻김굿을 연상케 하는 장면이지만, 그만큼 우리 사회에 정의롭지 못한 일들이 많았다는 것을 반추하게 한다. 지난 사건을 감독 나름대로 해석하기보다는-그랬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욕을 먹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분히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영화로 자리매김 하려는 시도를 읽어볼 수 있다. 게다가 무거울 수밖에 없는 내용을 위기에 대처하는 제주도민의 해학을 가미해 균형감을 갖춰 부담감 없이 영화를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사건을 보는 시각에 있어서 감독의 균형 감각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는 제주 4.3 사건을 당시 진압군과 제주도민 모두에게 비극적인 사건으로 다루었다. 누구만의 희생이 아니라 모두가 희생자였다는 것이 감독의 입장이다. 문제 삼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직까지도 사건을 책임지는 말을 하지 않는 미군정과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무차별적인 반공이데올로기다.

셋째, 영화예술의 공적인 기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도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내용은 제주 4.3 사건의 현실을 다루고 있는데, 사실 제주도에 국한된 이 사건은 특별법이 제정된 후에 평화공원이 세워지고 또 기념관이 건립되었어도 중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 단지 한 두 줄로만 정리되어 있어서 비록 국가 차원에서 사건에 대한 진상을 파악하기 위한 길을 열었다 해도 자라나는 세대와 국민적인 관심을 얻기에는 부족했다. 게다가 그동안 여순반란사건과 같은 맥락에서 다뤄졌기 때문에 반공이데올로기에 묻혀 그 진상조차 제대로 밝히지 못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영화로 만들어짐으로써 이 사건에 대한 공적인 논의가 가능해졌다. 특히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함으로써 <지슬>은 제주도민에 제한된 관심과 이슈를 대한민국과 전 세계로 확장시키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제주4·3사건을 다룬 영화를 세 가지 측면에서 분석해보았다면, 이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다음과 같다. <지슬>을 통해 감독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인터뷰에서 오멸 감독은 제주도민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슬픔을 말하고 또 달래고 싶었다고 한다. 이런 동기 탓에 감독은 사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데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같다. 영화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사실을 재현하지 않았다는 점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을 것인데, 여하튼 사실 재현에 대한 부담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기 때문에 감독은 당시의 사건을 코믹하면서도 다분히 그림 같은 분위기로 연출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화가로서의 이력도 한몫했을 것이다. 영화는 비록 제주도 서귀포시 동광리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의미는 전 세계적으로 확장될 수 있도록 했다. 감독의 이런 의도는 영화에서 잘 표현되고 있는데, 비록 제한된 지역의 사람들과 그들의 억울한 죽음을 말하고 있어도 상징적인 표현을 통해 외연의 확장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무엇보다 다행스러운 것은 오늘의 시점에서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고 오히려 위로의 맥락에서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어떤 이유로 있었든지 당시 그곳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은 희생자라는 생각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사건을 바탕으로 일어날 수 있었던 갈등을 봉합하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다고 생각한다.

감독이 말하는 슬픔과 위로는 영화의 내용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해안선 5km 밖 모든 사람을 폭도로 간주하고 무조건 사살하라"는 미군정의 소개령에 따라 군인들이 몰려오자 영문을 모른 채 동광리 사람들은 산속 동굴로 피신한다. 영화는 비좁은 동굴로 피신했지만 그들은 하루 이틀 지난 후에 내려갈 것을 기대하고, 돼지 먹이를 걱정하며, 집에 두고 온 어머니 걱정, 그리고 자식 걱정, 동네 청년 연애담 등 일상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이어간다. 영화는 이런 사람들이 영문도 모르고 오직 소개령에 의해 죽어갔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영화 제목 "지슬"은 영화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 많은 시사점을 제공하는데, '지슬'은 제주도 방언으로 땅에서 나는 열매인 '감자'를 뜻한다. 감자는 진압군의 허기를 채울 뿐만 아니라, 군인들에게 붙잡혀 있는 순덕에게 건네지는 것이었고, 동굴로 피신한 양민들이 조금씩 나눠먹으면서 오랜 시간동안 버틸 수 있도록 해준 양식이었다. 동굴 속의 양민들이 먹은 감자는 어머니가 죽어가는 순간에서도 자식을 생각하며 품에 안고 따뜻하게 데워놓은 것이었지만,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평소보다 단 맛이 더하다며 좋아한다. 대지와 어머니를 동일하게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장면이다. 여하튼 대지가 모두에게 공급하는 것이고 또 모두에게 동일한 의미를 갖는 감자다. 이런 점에서 포스터에서 읽을 수 있는 "당신과 나의 뜨거운 감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땅은 열매를 통해 모두에게 생명을 주고 있지만, 땅위의 사람들은 서로의 생명을 빼앗음으로써 혹은 영문도 모른 채 억울하게 죽게 함으로써 비극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현실을 고발하는 것이다.

 

<지슬>은 사회 고발적이면서도 치유적인 의미를 갖는 영화다. 정의가 부재한 시대에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비극을 전해준다. 이런 일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정의가 바로 서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양민 학살은 대체로 전쟁 상황에서 일어나는데, 이것은 혼돈의 시기일수록 깨어있어야 할 이유가 된다. 무엇보다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고 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념투쟁을 조장하고 있는 현 실정에서 이념갈등으로 초래한 비극은 이 땅에서 더 이상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슬>은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와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도록 부름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과제를 더욱 분명하게 환기하는 영화가 아닐 수 없다. 이념보다 생명이 더 귀하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겠다.

양민학살은 그리스도인이 참여해서도 안 되지만 결코 관용해서는 안 되는 문제다. 국제조약에 포함되어 있는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구별을 무시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해치는 살인행위이고 무엇보다 무죄한 피를 흘리는 범죄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가 간 전쟁이나 내전 혹은 테러행위에서 비전투원의 학살, 곧 선량한 시민의 학살 혹은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살해행위에 대해 그리스도인은 분명한 반대 입장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양민학살의 사례를 접할 때마다 의로운 분노를 발해야 하며, 양민학살의 주범이 권력의 힘을 빌려 책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다양한 방식으로 공론화함으로써 책임을 물어야 한다. 행동의 수위와 참여 방법은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어도, 양민학살 때문에 겪어야 했던 아픔과 상처들을 위로하는 일에 대해서는 결코 주저하지 말아야 하며 한 목소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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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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