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 칼럼] 레트로토피아시대와 교회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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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석학 지그문트 바우만(1925-2017)의 유작은 <레트로토피아: 실패한 낙원의 귀환>이었다. 오늘날 세계가 미래지향적으로 나아가기 보다는 과거로 퇴행하고 있다고 본 그는 레트로토피아(retrotopia)를 제목으로 정하였다. 레트로토피아란 레트로(과거)와 유토피아의 합성어로, 일종에 과거에 대한 향수이다. 그에 따르면 향수란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분명 퇴행적인 현상이다. 이전과 같은 대규모 전쟁이 줄었다고 하지만 내전과 테러, 폭력사태는 줄어들고 있지 않으며 전지구적 재난과 질병이 끊이질 않는다. 7,700 여 만 명의 난민이 세계를 떠돌고 있으며 인종주의와 극우주의의 부상, 혐오의 정치가 급부상하고 있음이 그 증거라는 것이다. 

이러한 퇴행적 현상은 여러 모습으로 펼쳐진다. 우선은 홉스(T.Hobbs)식 세계관으로 회귀이다. 공공의 세계관과 사회질서가 무너진 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새로운 개인 윤리로 등장하고, 극심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각자도생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러한 위기생황은 사람들로 하여금 민족, 인종, 종교라는 오래된 게토 안으로 뭉치는 신부족주의(New Tribalism)를 만든다. 빈부격차는 이제 완전히 ‘개인 책임’이면서 이제 개인이 가진 부의 정도는 신분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개인은 결국 불안한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고 아늑했던 원초적 기억의 장소인 경쟁이 없는 엄마의 자궁으로 되돌아가려는 내면으로의 망명을 시도하는 시대가 오늘이라는 것이 <레트로토피아>의 분석이다.   

한국사회는 이런 레트포피아의 유혹에서 벗어나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박명규는 80,90년대 추격주의 성공시대는 끝이 났지만 극심한 경쟁 속에서 각자가 생존해야겠다는 각자생존의 욕망이 자연스러운 시대가 되었다고 한국사회를 진단하고 있다. 일종의 “생존주의”로 넘치는 암보험광고와 대출광고가 전망 없는 미래를 대비해야하는 개인들의 양극화 상황을 드러낸다. 공동체적 결속력이 현저히 약화되고, 지역주의와 같은 한국식 신부족주의도 여전하다. 끼리끼리 함께하는 하는 모습들, 젠더 같은 원초적 감정을 중심으로 뭉치고 서로를 혐오하는 모습들이 빈발하고 있다. 2019년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남북미가 교착상태에 빠진 가운데, 북핵문제를 둘러싼 다양한 쟁점들과 문제들이 분출되고, 저성장 시대에 접어든 한국사회가 이를 둘러싼 이러한 문제들을 지속적으로 감당할 의지와 힘도 약화되면서 대립각이 형성되고 있다. 경제적 미래와 한반도의 미래가 불투명해지면서, 종족주의, 자민족주의, 이념을 기반으로 한 원초적 집단주의 현상이 강화되면서 서로 다른 집단, 계층, 세대, 지역 등을 둘러싼 서로를 향한 낙인찍기가 강화되고, 민족이나 이념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타인을 배제하는 감정정치가 더욱 기승하는 위험에 처해있다고 보았다.[각주:1]

문화 트렌드 가운데 최근 몇 년간 ‘레트로’ 성향이 고착화되고, 소확행과 케렌시아 등 미시 세계와 작은 행복에의 집중은 “자궁으로의 회귀”처럼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퇴각하는 젊은 세대들이 그려내는 오늘의 자화상 일수도 있다.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고 과거로 눈을 돌리는 레트로토피아적 현상 속에 한국 교회의 문화선교적 과제는 더욱 크다 할 것이다. 각자생존과 공동체의 급격한 해체 현상 속에서 교회는 어떤 의미의 연대와 공동체성을 지닌 경제시스템과 사회를 제안할 수 있을 것인가. 바우만이 하나의 유언처럼 남긴 사회학적 희망, 즉 소통과 대화에 대한 믿음이 미래로 나아가는 열쇠라면, 또 사회 구성원 각자의 문화적 관용과 민주적 심성을 통해 더 많은 대화와 커뮤니케이션만이 타자를 포용하고 이해하는 길이라 할 때, 교회공동체는 어떤 시민을 길러냄으로 더 나은 문화와 미래를 함께 열어 낼 것인가. 하나님 앞에서 인류는 선하신 그분의 피조물이며 존중받고 사랑받아야 할 한 사람이자 이웃임을 일깨우는 교회이어야 할 것이다. 꿈을 잃어버리고 미시 세계에만 머무르려는 세대들에게 일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꿈 자본을 생산해내는 담대한 상상력과 헌신의 공동체로 기능할 때, 세계는 보다 건설적인 미래를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바우만이 던진 마지막 통찰을 숙고하면서 레트로토피아 시대속의 바른 신앙과 교회됨을 모색하는 한국교회가 되어야 함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백광훈 목사(문화선교연구원 원장)


   

  1. 박명규, 「평화를 위한 새로운 상상력: 화해, 치유, 통일」, 제20회 국제학술대회,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201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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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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