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노래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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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의 삶과 꿈

(<전국노래자랑>, 이종필, 코믹 드라마, 12, 2013)

 

 

사전적인 의미에서 서민사회적인 특권이나 경제적인 부를 누리지 못하는 일반 사람을 일컫는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보통 사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이전에는 아무 벼슬을 하지 못하는 평민을 가리키는 데에 사용되었다. 오늘날 이 말은 선거철마다 거리에서 동네에서 시장에서 광장에서 표를 구걸하는 정치인들의 입을 통해 흔히 들을 수 있다. 실제로 서민을 위한 정치를 염두에 두었다기보다 그들의 한 표를 탐했을 뿐이다. 그들에게 서민은 단지 유권자요 정치적인 입신을 위해 필요한 디딤판일 뿐이다. 서민을 배제한 정치였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까지 정치는 그랬다. 그러다 보니 공공성을 바탕으로 서민의 이야기를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에는 언제나 슬픔과 분노의 정서가 빠지지 않고 있다.

서민의 애환을 담은 프로그램의 아이콘으로 여겨지고 있는 전국노래자랑이 영화로 만들어졌다. 기존의 서민을 다루는 방식과는 조금 다른 면을 볼 수 있다. 특히 <복면달호>를 계기로 음악영화의 가능성을 본 방송인 이경규가 제작자로 참여한 작품이다. 관객이 300만이 넘으면 1억 원을 기부하겠다는 야심찬 공약도 내놓았다. 과연 전국노래자랑만큼이나 장기상영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음악영화하면 뮤지컬을 연상하게 되고, 또한 서사를 음악으로 혹은 음악을 서사로 풀어나가는 장르이지만, 이경규는 1980년에 시작되어 현재까지 33년 동안 지속된 최장수 프로그램으로 서민을 위한 대표적인 프로그램 전국노래자랑에서 소개된 실화들을 소재로 삼았다. 그야말로 서민적인 발상에서 비롯한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영화를 통해 전국노래자랑이그토록 장수할 수 있었던 몇 가지 이유를 확인해볼 수 있다.

한편, 영화는 스토리텔링의 한 방식이다. 영화를 많이 접하다 보면 웬만한 이야기는 대충 그 결말을 짐작할 수 있게 되는데, 이는 모든 이야기가 소재와 플롯은 다르다 해도 공통된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소위 뻔한내용을 담고 있는 이야기는 관객들의 호응을 얻지 못한다. 관객의 주목을 끌기 위해 이야기는 어느 정도 충격이 있어야 한다. 특히 온갖 자극에 노출되어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전국노래자랑>은 서민의 삶과 꿈을 보여주고자 한다. 남녀노소 청춘남녀가 등장하고, 서민뿐만 아니라 시장도 출연한다. 사실 시장과 을의 관계로 얽혀있는 서민 맹 과장의 모습을 전해준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들의 사랑과 이별, 희망과 좌절, 성공과 실패, 가족 해체, 대형마트의 골목상권 진입으로 생계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소상인의 고충, 대리운전자의 처절한 투 잡 인생, 임대보증금 인상으로 빚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서민, 회사 내 갑과 을의 관계에서 당하는 고충 등을 이야기한다. 그런 와중에서도 가슴 깊이 묻어둔 사연과 꿈을 하나씩 하나씩 끄집어내며 그것을 기성 가요에 담아 노래한다. 누군가에게 전하는 고백이기도 하고, 상처받고 슬픈 마음을 스스로 위로하며 부르는 노래이고, 사람들의 성화에 못 이겨 출연하고, 누구는 그동안 접고 살았던 꿈을 키우기도 한다. 제품 광고를 위해 마케팅 차원에서 나오기도 했다. 그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얽히고설킨 이야기가 방송 출연을 계기로 노래와 함께 소개된다. 어느 것을 보아도 여론이 주목할 만큼 대단한 일은 아니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고, 사랑하는 사람을 배려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꿈을 이뤄보겠다는 소박한 마음을 담은 이야기다. 게다가 해피엔딩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통과하는 시점에서 서민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고 삶의 희망과 활력을 안겨주고 싶은 제작자와 감독의 마음을 물씬 느끼게 한다. 가끔은 이야기치고는 너무 평범해 오히려 사실성을 의심할 정도지만 서민이라면 누구나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서민의 삶과 꿈이라는 것이 다양하기는 해도 특별한 것이 없어서 대개가 다 거기서 거기다. 따라서 영화는 처음부터 뻔한내용을 전제로 하고 승부수를 던진다. 그런데 특별한 소재와 독특한 연출방식에 높은 가치를 주는 문화 환경에서 이토록 평범한 소재와 소박한 연출방식은 결코 특별하지 않은 서민들의 일상을 화폭에 담은 김홍도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도드라진 부분이 없으면서도 그렇다고 해서 결코 식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배우들의 주목할 만한 연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인데, 다른 한편으로는 영화 자체가 주는 재미와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맘 편하게 보면서 관객과 함께 울고 웃으며 나와 비슷한 처지의 서민의 삶을 슬쩍 들여다보면서, 혹은 그런 삶과 별반 다르지 않은 나의 일상을 멀찍이서 바라보면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을 것이고 힐링의 순간을 경험하기도 할 것이다. 물론 한 편의 영화 안에 서민의 삶 전체를 담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지나치게 단순화시켜 서민의 삶이 곡해되는 것을 염려하기도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서민의 삶을 서민다운 연출로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서민이란 누구인가?

 

영화 이해를 위해 서민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를 계기로 서민에 관한 생각을 정리해보는 것은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 신앙과 관련해서 볼 때 서민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앞서 언급할 부분은 서민은 다중적인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민은 산업화 과정과 함께 등장하여 대중매체의 발달에 힘입어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대중문화의 주체로서 대중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70-80년대 정치적인 억압과 경제적인 착취의 피해자로서 민중과도 다르다. 서로 교차되는 부분은 있으나 엄밀히 다른 개념 장치이다. 정치적으로는 유권자로서 권좌에 앉은 자와 대조되고 경제적으로는 노동자 혹은 근로자로서 재벌과 상반된다. 굳이 재벌이 아니라도 소득의 상위계층에 속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저소득 계층으로 분류되지 않는 중산층이다. 사회적으로는 특권을 누리는 자가 아니며 또한 약자로 인식되지 않는다. 간단하게 말해서, 서민은 권력도 없고 명예도 없으며 많은 재산을 소유하지 않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 약자로 취급되지 않는다. 서민은 어느 정도 신분 향상과 재산 증식 그리고 가족의 건강과 평안 그리고 행복을 위해 노력하며 일상의 고민을 안고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간다.

 

흔히 진보 정당은 서민을 위한 정치를 지향하고, 보수 정치는 재벌을 위한 정책을 펼친다고 도식화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도 옳지 않고 저것도 옳지 않다. 서민은 뚜렷하게 식별할 수 있는 계층을 일컫는 말이 아님을 명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재산이 많은 사람들이나 고위직에 공무원들도 자녀를 양육하고 먹고 사는 문제를 고민하면서 스스로를 서민으로 지칭하는 것을 보면 서민이 엄밀한 기준에 따라 식별이 가능한 개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물론 권력과 재력과 사회적인 인지도에 있어서 어느 정도는 서민과 그렇지 않은 자들을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와의 관계에서 혹은 어떤 상황에서 스스로를 어떻게 인지하고 있느냐의 차원을 염두에 두고 사용되는 개념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 누가 서민인가를 식별할 수 있는 엄격한 기준이 있기보다는 스스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가 서민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렇게 정의되는 서민은 신학적으로 이해될 수 있을까? 안병무의 민중 이해는 이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배경으로 갖고 있다. 안병무는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지배자 혹은 착취자와 차별적으로 이해되는 집단을 개념화 할 필요성을 느꼈다. 민중을 신학적으로 이해함에 있어서 그는 성서의 오클로스개념에 천착하였고, 이것의 내연과 외연을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확대 해석했다. 그리고 다시금 민중이해의 신학적인 정당성을 성경의 예수에게서 찾았다. 그럼으로써 예수는 민중이라는 기독론적인 진술을 하게 되었다. 성서신학적인 발견을 조직신학적으로 확장한 것인데, 이것은 분명 신학적인 추리에 있어서 오류이다. 증명되어야 할 것이 다시금 정당성을 위한 근거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 서민을 엄밀히 규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급히 신학적으로 이해하려고 나서지 않는 것이 좋다. 서민은 단지 스스로를 어떻게 의식하고 있느냐에 좌우하는 열린 개념이기 때문이다. 서민을 규정하려는 태도는 오히려 갈등과 분열만 조장할 뿐이다. 따라서 비록 노태우 전 대통령이 보통 사람의 시대를 표방하면서 스스로를 보통 사람으로 부르든, MB를 가리켜 뼛속까지 서민이라고 주장해도, 또한 수백억의 자산을 가진 경제인이나 정치인들이 자신을 서민이라 말해도 반박할 이유는 없다. 문제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해 갖고 있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서민 이해에 도움이 되는 것은 서민이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느냐 하는 것을 추적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서민은 주로 유권자를 향한 정치인들의 입에서 회자하는 서민을 위한 정치혹은 경제정책에서 서민 경제를 표방할 때 흔히 듣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서민은 일상의 고민이나 문제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은 삶을 사는 사람을 지칭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의식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약자라 하더라도 스스로를 굳이 서민으로 인식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서민이 아닌 것은 아니고, 또 고민한다고 해서 서민이 아닌 사람이 서민이 되는 것이 아니다. 서민은 의식의 문제이다.

한편, 서민을 배제하는 정치와 경제 정책에서 서민은 타자가 된다. 이런 점에서 타자개념과 서로 공유하는 부분이 없지 않으나 타자 개념으로 대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타자는 자신과 차별적으로 여기면서 배척하는 데 비해, 서민은, MB나 노태우에서 볼 수 있듯이, 스스로와 동일시하면서도 차별의 대상이 된다. 그러니까 서민이 타자로 이해될 때는 재벌과 특권 계층만을 위한 정치나 경제가 될 때이다. 타자로 이해되기도 하고 또 그렇지 않기도 한다.

 

마태복음 6장에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정확하게 오늘날 스스로를 서민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갖는 고민을 갖고 살지 말라는 말이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인과 서민의 관계에 대한 물음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리스도인은 스스로를 서민으로 의식하지 말라는 말일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예수님은 이런 염려들이 믿는 사람들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든 모두에게 피할 수 없는 일임을 환기하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살라는 말씀은 아니다. 부정어가 말해주고 있듯이, 그리스도인으로 부름을 받고 예수의 제자로 살기를 작정했다면, 이런 문제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설 수 있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한 차원 높은 삶,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기를 기대해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서 살라고 하신 것이다. 이는 세상 염려에서 초연해질 것을 말하는 것이지 무관하게 살라는 의미는 아니다.

 

서민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는 결코 부정적이지 않다. 서민은 때로는 작은 자로서 때로는 부름을 받은 자로서 신앙인이든 비신앙인이든 하나님의 돌보심을 필요로 하는 존재다. 재산과 권세의 소유 여부에 따라서만 서민을 규정할 수 없다. 다른 서민에 비해 먼저 부름을 받은 자로서 그리스도인은 서민이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며 살 수 있도록 그들을 돌보며 도우며 살도록 보내심을 받은 존재이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일상을 산다 해도 일상의 염려와 고민에 매이지 말고, 오히려 같은 고민과 문제의식에서 벗어나 그들에게 향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의지가 실현되도록 한다. 그리스도인은 비록 서민이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보내시는 자의 뜻대로 가서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며 살아갈 때 얼마든지 서민을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된다.

 

서민의 삶과 꿈을 접하면서 그리스도인은 그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뜻과 행위가 세상 가운데 나타날 수 있기 위해 부름 받았음을 깨닫고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단서를 얻을 수 있다. 정치인들이나 경제인들이 이기적인 탐욕에 매여 위로부터 주어진 능력과 권한을 서민을 위해 사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반서민적인 태도를 보일 때, 그리스도인은 정의와 인권과 복지의 이름으로 그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것들을 환기하며,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뤄지도록 헌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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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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