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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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와 의식

<내가 사는 피부>(페드로 알모도바르, 드라마, 2011, 19세)

기독교인들이 쉽게 선택하지 못하는 영화들이 있다. 대체로 하드보일드적인 표현들이 많은 영화다. 아무리 의미가 좋아도 표현에 거부 반응을 보일 정도가 되면 감상을 주저하게 된다. 예술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저항적이기도 하고 또한 현실에 부정적이기도 하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표현이다. 예술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사라질 일이지만, 어느 정도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런 영화들 가운데 손꼽히는 몇 편의 영화들은 스페인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에 의해 만들어졌다. 기독교인들이 그의 영화를 대면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소재들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알모도바르 감독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 하는데, <내가 사는 피부>는 티에리 종케의 “독거미”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원작이 있는 영화를 만들 때, 감독들은 시나리오 작성 과정에서 많은 고민을 한다. 원작대로 갈 것인지, 아니면 원작의 소재나 주제만 유지하고 이야기 구조를 바꿀 것인지, 아니면 주요 캐릭터만을 살린 채 색다른 이야기를 풀어나갈 것인지. 이번 영화에서 알모도바르 감독이 제목을 바꾼 것은 소설을 시나리오로 옮기는 과정에서 버릴 것과 취할 것을 선택하면서, 자신의 관점을 반영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야말로 알모도바르 감독이 소설을 어떻게 읽었느냐를 짐작케 한다. 그렇기 때문에 원작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본다면 감독의 독해과정을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다. 그는 소설에서 무엇을 읽었고, 무엇을 느꼈으며, 무엇을 인지하였는지 등. 영화만 보거나 혹은 먼저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는다 해도 영화 자체가 주는 느낌은 결코 반감되지 않는다. 그만큼 소설과 영화는 다른 장르로서 다른 이야기 세계를 전해주기 때문이다.

로버트 박사(안토니오 반데라스)는 유능한 성형외과 의사다. 성형에 있어서 근육과 신경조직까지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유전자 이식을 통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단순한 성형이 아니라 피부와 근육 그리고 신경조직까지도 변형시켜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내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부유한 삶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대 저택에서 산다. 그런데 그의 삶에 불행이 시작되었으니, 아내가 이부(異父)동생과 눈이 맞아 달아난 것이다. 게다가 자동차 사고로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심한 깊은 화상을 입는다. 로버트는 아내의 회생을 위해 수년간의 노력 끝에 인조피부를 만들어 가까스로 그녀를 살려낸다.

그러나 우연히 거울에 비친 자신의 흉측한 얼굴을 본 아내는 충격을 받아 창밖으로 뛰어내린다. 설상가상으로 엄마의 자살에 충격을 받은 로버트 딸은 대인기피증을 겪으며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 어느 날 고객의 결혼 피로연에 딸과 함께 참석했을 때, 딸이 연회장 정원에서 비센테에게 강간을 당한다. 실신상태로 현장에서 발견된 딸은 아빠 로버트를 오히려 강간범으로 오인할 정도로 정신적인 공황상태에 빠진다. 이 충격으로 딸의 대인기피증은 더욱 극심해지고, 결국 아내와 같은 방식으로 죽음에 이른다.

로버트는 딸의 죽음에 대한 애도를 넘어서 복수를 감행하는데, 그 방법이 매우 이색적이면서도 우리에게 익숙한 영화들의 이미지들이 교차한다. <올드 보이>(박찬욱)와 <나쁜 남자>(김기덕)가 그것이다. 로버트는 먼저 오토바이 사고로 위장하여 비센테를 납치한다. 그를 감금하여 동물처럼 다루고, 마침내 강제 성전환 수술을 시행한다. 게다가 죽은 아내의 유전자로 피부이식을 해 비센테를 아내의 모습으로 변형시키고, 그 아니 그녀에게 ‘베라’라는 새 이름을 준다. 소설에서는 베라를 강제로 매춘에 종사하도록 하면서 복수를 하지만, 영화는 다른 방법을 선택한다. 베라를 그녀를 방안에 가둬두고 CCTV로 바라보며 그녀를 탐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알모도바르는 어떤 생각에서 원작의 이야기를 이렇게 변형시킨 것일까? 감독의 의도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베라는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여성과 남성으로서 로버트와 함께 살자고 제안하지만, 로버트는 쉽게 그녀에게 맘을 열지 못한다.

극적인 전환은 이부(異父)동생 제카가 찾아옴으로써 이뤄진다. 과거 로버트 아내이자 자신의 연인으로 오인한 그는 베라를 강간하는데, 현장을 목격한 로버트는 제카를 죽인다. 이후 베라는 자신의 모습이 로버트의 죽은 아내의 얼굴이었음을 알게 된다. 베라에 대한 로버트의 태도가 사랑으로 바뀌지만, 베라 역시 스스로를 로버트의 아내와 동일시하며 그와 함께 머물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베라는 자신의 엄마가 자신을 애타게 찾고 있다는 기사가 게재된 신문에서 성형이전의 자기 얼굴을 본 후에 로버트와 하녀이자 그의 어머니를 죽이고 집으로 돌아간다.

<내가 사는 피부>는 피부를 소재로 복수와 인간욕망 그리고 정체성을 성찰하는 영화다. 따라서 피부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과 파생적인 의미를 숙지한다면, 영화를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피부는 우리 몸의 가장 바깥부분을 형성하기 때문에 빛, 더위와 습기, 바람, 공기 속의 눈에 보이지 않는 성분과 기운, 물리적. 화학적 자극 등 외부의 모든 자극을 제일 먼저 받아 민감하게 반응하거나 적절히 대응하는 조직이며 또한 땀이나 피지 등을 통해 신체의 노폐물을 배출하는 기관이다. 한의학에서는 기를 받아들이고 배출하는 곳으로 여긴다. 몸속의 장부(臟腑)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내부의 습열(濕熱)과 찌꺼기를 배출하여 원활한 신진대사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기관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피부는 크게 다섯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는데, 첫째, 신체 내부의 찌꺼기를 배출하고, 둘째,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아들이며, 셋째, 외부의 침입과 지나친 자극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며, 넷째, 타인과 관계를 맺는 기관이며, 다섯째, 성감을 느끼는 곳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피부에 대한 간략한 지식을 가지고 영화를 들여다보자. 먼저 영화는 물리적 심리적 사회적 그리고 철학적인 측면에서 피부의 다양한 의미를 성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물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성형외과 의사인 로버트에게 피부는 연구의 대상이며 생계를 위한 수단이다. 피부를 연구하여 새롭게 만들고 또 변형하며 성형하는 의료기술을 통해 돈을 번다. 둘째, 사회적인 측면에서 피부는 개체성을 특징짓는 부분이다. 형체를 식별하기 위한 부분이면서도, 나와 타자, 나와 세계와 구분을 짓는 경계선이고 또 정체성을 규정짓는다. 인종을 구분하는 표식이기도 하다. 백인, 흑인, 황인 등의 인종개념에서 키워드는 피부의 색깔이다. 셋째, 디디에앙지가 말하듯이, 피부는 몸의 대표격으로서 관계의 주체인 자아이다. 피부는 상처를 통해 과거에 대한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다. 또한 누구와 피부를 맞대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 로버트와 제카의 어머니이면서 하녀인 그녀는 두 명의 남자와의 관계에서(피부접촉을 동반했음이 분명하다) 두 명의 아이를 갖는다. 로버트의 아내는 이부동생인 제카, 자신의 경계를 떠나 이질적인 피부 접촉을 향해 달아나지만 결국 자동차 사고로 스스로를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피부에 심한 화상을 입는다. 화상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조차도 비극적이게 만든 것이다. 비센테가 로버트의 딸에게 행한 강간은 그녀와 강제로 피부 접촉을 시도한 것이며, 그 때문에 딸은 타인과의 접촉을 피하는 대인기피증을 앓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넷째, 연구의 대상이며 생계의 수단이었던 피부는 아내와 딸을 잃은 로버트에게 복수의 매개가 된다. 비센테에게 행한 강제 성형을 의미한다. 로버트의 아내의 모습으로 변형되어 베라로 새로 태어난 비센테에게 피부는 새로운 정체성이면서 동시에 감옥이다. 로버트는 베라를 외부세계로부터 고립시키기 위해 몇 겹의 장치를 했는데, 그 첫 번째가 피부였다. 아내의 피부로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외부의 자극을 쉽게 느끼지 못하는 피부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비록 외부의 자극을 느끼지 못하는 피부라도 외부와 차단된 것은 아니지만, 감독은 무감각의 피부를 통해 베라의 고립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몇 가지 의문을 피할 수가 없다. 첫째, 심한 화상을 입은 아내를 살려낸 이유는 무엇인가? 자신을 배신하고 달아난 아내가 아니지 않는가? 그는 왜 그녀를 살려냈을까? 그리고 어두운 방에서 결코 밖을 볼 수 없도록 했을까? 둘째, 자신에게 고통을 안겨준 아내의 모습으로 성형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넷째, 베라에 대한 사랑은 또 무엇을 말하는가? 복수의 대상을 살려내고(아내), 또 여성으로, 그것도 바람난 아내의 모습으로 성형하고, 관음증을 누리며, 결국에는 그녀를 사랑하고, 또 그녀에 의해 죽는다는 설정은 납득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해결책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 특이한 것은 피부라고 하는 소재를 통해서 이야기를 끌어가는 것이다. 단순한 피부가 아니라 피부의 은유적인 의미를 성찰하고 있다. 따라서 철학적인 의미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피부가 철학적인 의미를 갖게 된 것은 모리스 메를로 퐁티의 지각현상학에서이다. 지각(혹은 몸의) 현상학자로 잘 알려진 모리스 메를로 퐁티에 따르면, 몸과 마음의 관계는 더 이상 데카르트적이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로 몸이 있기에 마음이 생긴다. 쉽게 말해서 인식의 주체이면서 나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몸이지 마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알모도바르 감독이 메를로 퐁티의 철학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영화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한편, 프랑스 출신의 정신분석학자인 디디에앙지외는 책 “피부자아”에서 누군가가 나의 피부를 만지는 것을 느끼고, 내가 누군가의 피부를 만짐으로써 ‘자아’는 탄생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피부’는 피부 그 자체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하나의 은유로서 그 의미가 확장된다. 그래서 그는 “자아는 피부다”라는 명제를 제시하기에 이른다. “피부”란 몸의 경계다. 세계를 지각하는 주체이면서 또한 나와 너, 나와 세계를 구분 짓는 부분이다.

다시 말해서, 아내의 화상은 관계의 왜곡이 가져온 심판이었고, 로버트가 심한 화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는 아내를 살려낸 것은 흉측하게 변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살아가도록 한 복수의 행위였다. 아내가 스스로 자신의 흉측한 피부를 보면서 과거를 기억하며 고통스럽게 살아가도록 한 것이다. 그녀의 죽음을 그는 결코 슬퍼하지 않았던 것이 회생 자체가 복수 행위였음을 감지케 한다. 그녀는 결코 외부와 접촉할 수 없는 공간 곧 피부에 갇힌 삶을 살 수밖에 없었지만, 자살함으로써 스스로 그 공간을 깨고 나온 것이다.

그리고 로버트가 비센테에게 인공피부를 입히고, 모기에도 물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열과 같은 외부의 강한 자극을 잘 느끼지 못하도록 만든 것은 밀폐된 공간이 아니라도 이미 폐쇄된 공간에 갇혀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또한 비센테를 아내의 얼굴로 성형한 것은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복수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로버트가 비센테의 몸과 아내의 형상을 가진 베라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이해하기가 쉽지 않지만, 이렇게 생각해보면 될 것 같다. 로버트가 잃어버린 것은 아내의 피부였다. 유전자를 통해 재생한 아내의 피부를 통해 그는 아내를 다시 얻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베라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베라는 로버트의 기억 속에서 형성된 자신의 아내였다. 게다가 제카를 죽인 후에 로버트의 아내로서 스스로를 인식하는 베라의 정체성임을 형성한 것은 의식이 아니라 몸이었다. 다시 말해서 로버트에게 베라는 더 이상 딸을 강간한 비센테가 아니었다. 죽은 아내가 다시 살아난 것이었다. 새로운 형상 베라는 로버트의 창작물이며 동시에 우상이었다. 로버트가 죽은 것은 바로 자신의 형상물이며 우상에 의한 것이었다.

한편, 비센테는 결국 몸이 아니라 의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한다. 한편의 사진으로 자신의 본래적인 정체의식이 깨워진 것이다. 그러다가도 마지막 장면은 의식이 아니라 자신이 입고 있는 옷으로 자신을 확인시킨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옷이 아니라 그 옷에 대한 동생과 자신의 지각과 공동의 기억에 의해 자신이 비센테임을 확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영화는 인간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의식만이 아니라 몸 특히 피부임을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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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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