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쉬니 너희도 쉬어라! by 현요한 교수(장신대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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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쉬니 너희도 쉬어라!"

주님 안에서 누리는 안식과 평화, 그리고 공동체

 

 현 요 한




ⓒ motzi



안식일 계명은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십계명 중에서 우상을 금지하는 계명 외에 가장 긴 설명이 붙은 계명이다. 왜 안식일을 지키는가? 출애굽기 20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제 칠일에 쉬셨으므로 사람도 쉬라고 하셨다(20:10-11). 이는 제한된 능력을 가진 인간들에게는 끊임없는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실제적인 복음이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며 쉬지 못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안식일은 해방이요 복음이요 구원이었다(5:15)

내가 쉬니 너도 쉬어라! 어찌 보면 매우 억지스럽고 강압적인 말처럼 들릴 수도 있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강압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라고 하는 초대이다. 몰트만이라는 신학자는 하나님의 창조의 꽃은 인간이 아니라, 안식일이라고 한다. 모든 창조는 하나님의 안식을 향하여 방향지어져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엿새 동안 창조하시고, 피곤하셔서 쉬신 것은 아닐 터이다. 이는 안식 속에서 창조세계의 완성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며 그 뜻이 성취되었음을 기리는 것이다. 너희도 쉬라는 계명은 그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즐거움과 안식을 사람들과 함께 누리며 즐거워하려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초청이다. 성경에는 여러 번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감에 대한 말씀이 등장한다. 영원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곧 궁극적 구원을 의미하기도 한다(4:3). 안식일은 여호와의 안식일이다. 신약성경적으로 말하면,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님이다. 안식일은 그냥 쉬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을 함께 누리는 날이다. 그러기에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님이라는 말씀과 안식일은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2:27-28) 말씀은 모순이 아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주님의 안식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하나님은 일(창조사역)을 하신 후 쉬셨지만, 처음 사람은 쉰 다음에 일을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아담이 창조된 날이 제6일인데, 유대인의 관습에는 해가 지면 날짜가 바뀐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아담은 창조된 직후 저녁부터 안식일에 들어간 것이다. , 그는 아무 일도 하기 전에 안식일을 지켜야 했다. 안식일은 그에게 단순히 노동으로부터의 휴식만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영광의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예배하는 날이었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의 그러한 교통 없이 일을 시작할 수 없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쉬셨기 때문이 쉰다. 그것은 얽매는 종교적 계율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된 안식에의 초대이다. 그러나 인간의 불신과 이기심은 이를 무거운 멍에로 여기게 되었다(8:5, 13:15-22).

내가 쉬니 너도 쉬어라! 이는 하나님의 안식을 함께 누리라는 초청이다. 안식을 누리는 것에는 이와 같이 근본적으로 함께 안식을 누리는 공동체적 차원이 결부되어 있다. 하나님은 홀로 안식 속에 침잠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하나님 자신의 안식을 나누시기를 원하신다. 더 나아가서 이제 하나님은 사람들도 함께 안식을 나누기를 원하신다. 자기만 쉴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모든 가족, 종들, 머물고 있는 나그네, 가축들까지 모두 함께 쉬라고 하신다(20:10). 나만 홀로 쉬고 다른 이들은 여전히 일해야 한다면, 이는 공평하지 않은 것이며, 쉬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억압이 된다. 그것은 공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안식이라는 것의 근본적인 함께 나눔의 차원, 공동체적 차원을 상실하게 한다. 물론, 복잡한 현대 사회가 멈추지 않고 돌아가기 위해서는 남이 쉴 때에 일해야만 하는 사람도 더러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칠일에 하루는 반드시 쉴 수 있도록 보장되어야 한다.

우리로 하여금 쉬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 안에도 있고 우리 밖에도 있다. 우리 안에 있는 것은 바로 우리의 욕심이요 불신이다. 안식일을 마련해 주어도 사람들은 쉬려고 하지 않는다. 안식일에 더 일하면 소득을 더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욕심이 우리를 붙잡는다. 많은 사람들이 필요 이상으로 양식을 구하고, 그것을 창고에 쌓고, 그리고 그것을 소유로 여기고, 그 소유가 많으면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된 안전이요, 거기에는 참된 안식이 없다. 혹 어떤 이들은 일하고 일하다가 일이 습관이 되고, 일 중독이 되기도 하여 쉬지 못한다. 또한 사람들은 사랑하는 하나님의 돌보시는 은혜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쉬지 못한다. 광야에서 매일 만나가 내릴 것임을 믿지 못한 어떤 이스라엘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이틀 치를 모아 오기도 한 것처럼,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지 못하면 안식이 없다.

우리 밖에서 우리를 쉬지 못하게 하는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걱정하고 근심하게 하는 여러 가지 상황들이다. 그런 염려에서 벗어나 안식하는 길은 걱정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머리를 흔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것이다. 주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다(14:1).

우리를 괴롭히고 쉬지 못하게 하는 것들 중에서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것은 사람이다. 우리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사람 말이다. 군대 이야기를 할 때, 흔히 전방에서 근무하면 힘들고 후방에서 근무하면 쉽다고들 한다. 그러나 사실 전방에서 근무해도 좋은 상급자들과 좋은 동료들을 만나면 그리 괴롭지 않다. 반면에 후방에서 근무해도 괴롭히는 사람들을 만나면 한 없이 괴로울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과의 평화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안식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평화로움,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의 평화로움에 달려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평화롭게 하고, 우리들 서로 서로의 사이를 평화롭게 하는 은혜이다(2:11-18).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과의 관계를 평화롭게, 화목하게 하는 것이다(5:1). 그런데 주님은 주님과 나 자신 사이의 평화가 다른 사람들과 나 사이의 평화와 불가분리임을 보여 주신다. 심지어 주님은 하나님께 예배하러 왔을 때에도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리고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다(5;23-24). 주기도문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가 들어 있다. 내가 남에게 범한 과실에 대하여 사과하는 것도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남이 나에게 범한 과실에 대하여 남을 용서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람들 상호간의 관계에 평화를 이루기를 원하신다. 사람들 서로 간에 평화가 없으면 마음에 안식이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평화롭지 못하거나, 사람들과의 관계가 평화롭지 못한데, 혼자 스스로 마음이 편하다고 노래 부른다면 그 역시 어울리지 않고 가증스럽기조차 할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남이 내게 범한 과실 때문에 괴로워한다. 나로서는 관계를 회복하고 싶은데 상대방이 사과를 하지 않으니 어떻게 용서를 하겠느냐고 반문하면서 마음 아파한다. 그렇다. 사실 상대방이 사과는 커녕 잘못했다는 생각조차 없는데 용서한다는 것은 이상해 보인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내 마음 속에는 용서의 마음이, 용서의 기도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실상 나 자신이 더 고통스러워지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불편해진다. 예수님 자신도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을 용서하시며 기도하시지 않으셨던가 (23:34)! 용서는 마음에 치유를 가져오고, 안식을 가져온다. 내 마음의 안식은 이러한 공동체적 관련성과 분리될 수 없다. 화목을 추구하는 마음의 용서와 평화와 안식이 실제로 구체적인 평화와 안식을 만들어낸다.

 

현요한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장로회신학대학교의 조직신학 교수로 재직 중에 있고 문화선교연구원의 자문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 위의 글은 문화선교연구원에서 발행한 문화매거진 <오늘> 2007년 7-8월호에 실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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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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