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평범성
<도희야>(정주리, 드라마, 청소년관람불가, 2014)
이창동 감독이 기획자로 참여했다는 정보를 바탕으로 필자는 이 영화가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내용일 것임을 예상했고, 감상 후에 어떤 종교나 제도가 아니라 인간에 의한 인간의 구원을 역설하고 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른 영화에 대해 글을 쓰는 방식과 달리 이번에는 영화의 내용을 기술하는 것 자체가 영화를 이해하는 한 방법이 될 것 같다. (스포일러주의)
외딴 바닷가에서 사는 중학생 나이의 도희, 그녀의 엄마는 가출하여 부재상태다. 엄마의 부재로 유전적인 연결고리를 상실한 상태에서 도희는 가족의 한 일원으로 살아야 한다. 할머니는 구박하고, 아빠는 술만 먹으면 폭력을 일삼는다. 가출한 며느리와 아내에 대한 분노를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게다가 또래 아이들 틈에선 집단 따돌림을 당한다. 이름을 가지고 있으나 누구에 의해서도 불리는 경우가 없다. 그녀는 그저 마을의 한 존재일 뿐이고 따돌림과 폭력의 피해자로서만 존재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경찰에 의해 혹은 학교 선생님 혹은 마을 사람들에 의해 보호를 받아야 마땅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녀에게 관심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다면, 오직 폭력의 희생자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뿐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마을 사람들에 의해 철저하게 외면당한 채, 누구도 돌보지 않는 도희가 외딴 바닷가에서 살고 있다. 길가에서 개구리와 더불어 노는 첫 장면으로 시작해서 다방면의 폭력에 노출된 채 살아가는 도희의 모습은 공동체에 의해 버려진 존재임을 실감하게 하고, 관객으로 하여금 과연 누가 이 소녀를 구원해 낼 수 있을 것인가를 묻게 한다.
도희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그녀의 이름을 불러준 사람은 경찰대학 출신으로 이 지역 파출소장으로 부임하는 영남이다. 영남 역시 마음에 깊은 상처를 안고 있다는 것은 잠을 자기 위해 밤마다 술을 마시는 모습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동성애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와 편견으로 쫓기듯이 왔지만, 그녀의 고통과 문제가 쉽게 극복될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누구와도 쉽게 소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을에 머무는 중에 영남은 일상화된 두 형태의 폭력을 경험한다. 모두가 도희 아빠에 의해 행해지는 것인데, 하나는 도희에 대한 폭력이고, 다른 하나는 불법체류자에 대한 임금 착취와 폭력이다. 도희 아빠는 노인들만 사는 마을에서 유일한 젊은 사람으로서 마을의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경찰마저도 그가 마을에 꼭 필요한 일꾼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의 폭력행위를 묵과한다. 폭력행위뿐만 아니라 외국인 노동자의 불법체류도 묵인하는 까닭은 그것이 마을을 살리는 일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폭력과 불법이 묵인되는 상태에서 새로 부임한 파출소장 영남은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이며, 또 도희는 누가 돌볼 수 있을 것인가?
영남은 몇 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불법적인 행위를 멈추지 않는 도희 아빠에 대해 공권력을 행사한다. 문제는 해결되는 듯이 보였지만, 우연히 영남의 동성애 행각을 목격했던 도희 아빠는 그 사실을 경찰에 알리게 되고, 심지어 아빠의 폭력을 피해 자신에게 온 도희를 방학동안 잠시 맡아 있었던 것을 아동 성추행으로 고발하기까지 한다. 더 이상 피할 곳이 없게 된 영남은 마침내 법의 심판을 받게 되는 상황으로까지 몰리게 된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도희는 영남을 구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데, 그 결과 오히려 아빠를 성폭행 현장범으로 만들어 버린다. 사실을 알게 된 영남은 과거 할머니를 죽음으로 이끈 오토바이 사고도 도희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폭력의 희생자로만 있다가 점점 괴물로 커가는 도희를 도대체 누가 구원할 수 있을 것인가? 오늘날 도희는 누구이며, 누가 도희를 구원해낼 수 있을 것인가?
어린 소녀가 괴물로 자라도록 만든 것은 일상적으로 폭력을 행하는 사람을 마을을 위해 필요하다는 이유로 용납하고 또 폭력에 노출된 채 살아가는 희생자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무관심이었다. 도희는 꿈 많은 소녀에 불과하고 결코 악인이 아니지만, 일상의 폭력을 묵인하는 분위기는 그녀로 하여금 끔찍한 사건을 일으키게 만든 것이다. 이것은 ‘악의 평범성’을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악의 평범성은 독일의 여성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개념이다. 1963년도에 출판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그녀는 홀로코스트와 같은 역사 속 악행은, 광신자나 반사회성 인격장애자들이 아니라, 일상적인 악에 순응하며 살았던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행해진다고 주장했다. 먹고 사는 일이라고 해서 대한민국의 국격을 높이는 일이라고 해서 우리 가운데 악을 관용한다면, 악이 평범성은 우리 가운데 현실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도희야>는 바로 이점을 환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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