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함께-죄와 벌>은 주호민 작가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다. 총 3편 중 1편의 내용을 담고 있다. 영화를 본 많은 관객들은 웹툰의 인기가 그대로 영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로 가득 차 있다. 영화를 본 주호민 작가도 만족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렇게 볼 만한 이유를 잘 갖춘 영화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화려한 컴퓨터 그래픽 이미지(CGI)는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한국 디지털 영화의 현주소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판타지 장르에 걸맞게 화려한 장면에 비중을 너무 많이 두다 보니 영화적인 맛은 제대로 살렸다 해도 스토리텔링이 다소 부실하다는 느낌을 받는데, 이는 웹툰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한 까닭에 그렇게 된 것이리라 생각한다. 영상 자체만으로 큰 실험적인 작업이었다는 데에 의의를 두고 보면 좋겠다.
게다가 내용이 아주 단순하게 권선징악의 구조를 따라가고 있으며 약간의 반전도 있어서 가족 영화로서 제격이다. 다만 한 인간이 살아온 삶을 통해 간접적으로 조명되는 사회를 은유적으로 고발하는 내용이라서 아이들의 영화 이해를 위해선 영화지도가 필요할 수도 있겠다.
영화의 배경: 불교
영화의 배경은 불교이며, 불교의 내세관을 따르고 있다. 그 중에 특히 49재에 집중한다. 49재는 사람이 죽은 지 49일째에 망자가 좋은 곳에 다시 태어나길 기원하며 거행하는 불공 의식이다. 환생교리 혹은 윤회사상을 바탕으로 한다. 기독교인에게 낯선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는 의식이긴 해도 타종교의 삶을 이해하는 차원에서 감상한다면 거부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영화가 보여주는 죽은 후 49일 간의 모습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 무엇이 결여되어 있는지를 말해주는 기간이다.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거나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행했음을 폭로한다. 망자에게 사후 49일 간은 미처 돌아보지 못한 자신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다. 이 때 깨달음을 얻으면 다음 생을 갖출 준비를 마친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오랜 시간 지옥에 갇혀 지내야 한다. 죽어서 깨닫는 일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마는, 불교에는 환생의 모티브가 있기 때문에 죽어서라도 깨달음을 얻으면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깨달음은 환생 후 다음 생을 위해 크게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49재라 하여 불공을 드리는 것이다. 그러니 살아 있는 자는 49재를 지내면서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는 것이다.
이건 가톨릭에서 말하는 연옥설과 매우 유사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연옥은 사람이 죽으면 육체와 분리된 모든 영혼이 가는 곳으로 이곳에서 영혼은 정화된다. 이곳을 거쳐 정화된 영혼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이곳에서 체류하는 기간은 딱히 정해져 있지 않으나 살아 있는 동안의 공적에 달려 있고 또한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의 정성에 따라 기간이 달리 결정된다는 점에서 불교의 49재와 유사하다 하겠다. 종교개혁에 불을 붙인 원인이었던 면죄부는 바로 이런 교리적인 배경 때문에 판매 가능할 수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영화가 불교의 49재를 빌려 스토리를 전개하면서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건 오늘 우리 사회의 밝고 어둔 면들이다. 특히 쉼이 없는 삶의 곤고함이 어떠한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리고 가난 때문에 겪는 삶의 악순환들을 끊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보여준다. 부지중에라도 죄 짓지 않고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군대에서 일어난 각종 사건들이 어떻게 은폐되는지, 원한을 품고 죽은 사람들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줌으로써 살아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의 눈에 피눈물이 흘리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강력하게 경고한다.
기독교인들에게 주는 의미
지옥이나 환생의 교리를 믿지 않는 기독교인에게 이 영화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무엇보다 불교를 포함해서 율법적인 종교가 왜 선한 행위를 강조하는지 그 이유를 파악할 수 있다. 선한 행위를 하는 건 한편에서는 지옥의 심판을 이겨내려는 것이기 때문이나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이 다음 생을 위한 업을 쌓는 일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불교의 내세관이 우리(기독교인)의 내면에 얼마나 깊이 각인되어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죽은 자를 위해 49재를 올리는 이유는 죽은 자의 환생 때문이고,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내는 이유는 망자가 원혼이 되어 산 자를 괴롭히지 않고 오히려 조상신이 되어 후손들을 지키고 보호해줄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49재의 관습을 따르는 사람들이 여전하고, 또한 제사를 드리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비록 문화적인 행위라고 본다 해도 종교적으로 각인된 문화이기 때문에 삼가는 것이 좋겠다. 무엇보다 이것을 대체할 기독교문화 생산이 시급하다.
영화 내용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지만 기독교 내세관과 관련해서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지옥은 존재하느냐 하는 것이다. 요즘에는 사후 세계에 관해 말하기를 주저하는 경향이 많고, 종말론 자체도 더 이상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언급하기보다는, 인간의 소망과 소망의 이유를 말하는 데에만 집중한다. 그러니 지옥에 관해 언급하는 것 자체가 조심스럽다.
지옥의 존재에 관해서는 신학적으로 다툴 일이지만, 무엇보다 성경에서 지옥을 말하는 의도는 분명하다. 이 땅에서의 바른 신앙과 삶을 환기하는 데에 있다. 윤리적인 의도 못지않게 신학적인 의도 역시 강하다 함이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 가장 잘 나타나 있지만, 온전한 육체로서 지옥에서 사는 것보다 비록 지체 중 하나가 없다 해도 영생을 얻는 것이 낫다고 말하는 데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니까 지옥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지 않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이 극대화한 곳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사는 동안 지옥을 말하는 건 다분히 윤리적인 동기에서 비롯한다.
<신과 함께-죄와 벌>은 한 사람의 죽음을 말하면서 역설적으로 삶의 보편적인 가치를 말한다. 불교적인 세계관이라고 해도 기독교인도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는 방식이기에 원작에 높은 의미와 가치를 두지 않을 수 없다. 불교 영화의 요소가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며 볼 수 있었던 것도 불교 가르침에 매이지 않고 오히려 종교성을 틀로 해서 사회성을 지향하도록 연출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기독교 세계관으로 만들어진 <오두막>이 기독교 영화로만 평가되고 또 기독교인 사이에서만 소통되었다는 점은 아쉽다. 그 이유는 영화가 선교의 일환으로 만들어졌고, 그래서 기독교 가르침(삼위일체)에 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은 아닐지 싶다. 기독교 세계관이 예술로 영화로 거듭나기 위해선 과감한 상상력을 허용하는 풍토가 마련되어야 한다.
최성수 |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문화선교연구원의 취지 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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